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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숫대야가 없다면 모두 목청껏 함성을 질러봅시다.
 수령따라삼만리
 2017-03-02 17:18:31  |   조회: 3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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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



[ ...... 그 새를 박멸하는 것은 마오 주석과 당 중앙이 우리에게 하달하신 정치적 임무입니다 ..........


...... 모두 새총을 쥐어야 합니다. 새총을 쓸 수 없다면 징을 울립시다 ........... ]



제사해 운동

나무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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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부 마오쩌둥이 지시한 유례 없는 대규모 해충, 해조 박멸 운동. 제사 해 한자로는 除四害运动除四害運動(4가지 해로운 것을 제거하는 운동)이라고 한다. 사실 이쪽이 정식 명칭이지만, 특별히 참새만을 때려잡는 걸 따로 타마작운동(打麻雀运动打麻雀運動)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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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사해는 중국 인민들에게 해를 끼치는, 즉 4가지 해로운 것으로 이는 각각 모기(蚊子), 파리(苍蝇), 쥐(老鼠) 그리고 참새(麻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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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해를 박멸하겠다는 마오의 의지는 1958년 10월에 전국적인 '제사해 운동'으로 이어졌다. 마오는 연설을 통해 중국 인민에게 해를 끼치는 사해를 박멸하겠다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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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공사의 동지들이여, 그 새를 박멸하는 것은 마오 주석과 당 중앙이 우리에게 하달하신 정치적 임무입니다. 우리 대대는 집집마다 총동원하여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대오를 지어 모두 새총을 쥐어야 합니다. 새총을 쓸 수 없다면 징을 울립시다. 징이 없다면 세숫대야라도 울립시다. 세숫대야가 없다면 모두 목청껏 함성을 질러봅시다. 모두가 이렇게 한다면 그 새가 박멸되지 않겠습니까


뭘 하냐구요 저 X같은 새 놈들을 놀래키기 위해 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걸 기억해야 합니다. 그 새들이 땅이나 가지 위나 지붕 처마에 앉지 못하게 하여 저 양식이나 축내는 교활한 새끼들을 지쳐 죽게 해야 하는 겁니다!


- 당시의 중국 공산당 연설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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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참새를 잡는 방법은, 총이나 새총과 같은 물리적인 수단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하늘을 날도록 하여 탈진시켜 잡는 것이었다. 잠자리채, 올가미, 새총 등은 참새를 잡기엔 너무 비효율적이였고, 그렇다고 인민들에게 총을 풀었다가는 내전 우려 및 치안 불안 등의 문제가 생기는 탓에 총도 지급되지 않았다. 고로, 특정한 날을 정해 참새가 앉을 만한 곳에 사람을 풀어놓고 계속 시끄럽게 하거나 뭔가 휘둘렀다. 참새들은 착륙을 못하고 탈진할 때까지 날다가 추락했다. 물론 이런 방법 말고도 여러 다른 방법이 이용되었으나 이렇게 탈진시켜 사냥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농사를 지으라고 해도 모자랄 판에 저게 뭔 짓거리야



이러한 항쟁의 결과는 59년에 나타났다. 1958년 한 해 동안만 참새 2억 1,000마리가 학살당해 거의 멸종의 위기에 이르자, 참새가 잡아먹고 살았던 메뚜기 등 각종 해충의 개체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역사에 길이 남을 대흉년이 발생해 공식발표 1,000만 명, 평균 2,000만 명, 최대 4,000만 명의 기록적인 아사자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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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당 지도부는 소련 서기장인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빌어 연해주에서 20만 마리의 참새를 공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참모들이 마오 주석에게 이 '참새 전쟁'을 계속할지 물으니, 이 모든 사태를 시작한 장본인인 마오 주석은 다시 다음과 같이 교시했다.


算了(쑤안러그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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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 생산을 위해 모든 자원을 쇠 모으기에 집중했다. 비료 생산에 투입되는 에너지를 모조리 제철 공장(공장이라기보단 각 가정에서 어설프게 만든 재래 풀무가 더 많았다!)에 퍼붓는가 하면 곡식 운반용 화차까지 고철 화물용으로 넘겨서 안 그래도 모자란 수확량이 현지에서 썩어나고 말았다. 또한 인민들은 농사보다는 고철 모으기에 진착했고, 성과를 내기 위해 농기구를 부숴서 고철로 만들어 바치기도 했다. 그렇게 고철을 긁어모아 제련한 철조차 아무런 쓸모가 없는 폐급이었다는 점이 문제. 멀쩡한 쇠를 폐급으로 만드는 마술



사실 이 때의 수많은 사상자를 낸 홍수는 자연 재해가 아니라 인재다. 위에서 설명한 철 생산 운동을 하기 위해 토법고로라고 하는 원시적인 용광로를 이용했는데, 이 용광로에서 사용될 연료를 마련하기 위해 산에 있는 나무를 모조리 베어버렸다. 이러니 이전에는 별일 없었을 강수량에도 홍수가 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병크는 1990년대 산을 모조리 개간해서 식량난을 극복하겠다던 북한이 비슷하게 따라하다 식량난이 더욱 악화된다.



새로운 작황방법을 실시한답시고 곡식의 종자를 이전보다 빽빽하게 심게 했다. 그러면 단위 생산량이 2배로 늘어난다는 것. 하지만 이렇게 빽빽하게 심은 종자는 역으로 자랄 공간이 부족하여 잘 자라지 못했다. 하긴 주석이란 분이 옛것을 오지게 싫어하는 분이시니


이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무기와 기술 원조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는데, 외화가 부족한 중국은 식량으로 계속 상환했다. 이러면서 우리는 풍년이 들었다 며 허세를 부렸다. 하지만 실상은 그동안 고위 관리조차도 배급이 줄어 쫄쫄 굶고 있었다.


게다가 서류상으로는 농업 생산량이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앙 정부가 구제를 거부하는 사태까지 일어나 이를 악화시켰다. 농업 생산량이 약화된 농촌에 자연 재해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타격을 입혔고, 거기에 대약진 운동이나 참새 운운하는 등의 마오쩌둥의 삽질로 확인사살을 하는 바람에 역사에 남을 만한 대기근이 발생했다고 보면 된다. 그 결과 중국 공산당 내에서도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져, 신 같은 존재였던 천하의 마오쩌둥도 1959년 주석직을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로 이 실패의 영향은 막대했다. 이 무렵에 마오쩌둥의 뒤를 이어 부상한 것이 정부의 류사오치 주석과 당의 덩샤오핑 총서기였고, 이들은 실용적인 개방 개혁 정책을 펴면서 마오쩌둥이 벌인 일의 뒷수습을 한다.



당시 상징적인 지위밖에 남지 않았던 마오쩌둥은 이들이 자신들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자신의 정책을 모조리 뒤집자 직접 나서지 않고 홍위병의 손을 빌어 이들을 몰아내게 하는 음모를 꾸민다. 이것이 바로 문화대혁명.



결과적으로 이런 양극단을 오가는 정책은 중국을 한국보다 20년 뒤떨어지게 했다. 그리고 이 당시 어른들이 시켜서 새총을 들고 들판을 누비며 참새 헌터 짓을 했던 아이들은 10년 후 어른들을 사냥하는 홍위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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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강증산운동



1957년 중국의 철 생산량은 534만 톤에 불과했다. 그러나 대약진운동시기에 생산량의 두 배를 증산하여 1,070만 톤을 생산할 것을 목표로 삼았다. 도시∙농촌 전 지역에 약 60만 개의 토법로가 설치되었으며 9,000만여 명이 철을 제련했다. 집집마다 철제 솥이나 철문을 녹였으며, 아이들은 폐철을 구하러 돌아다녔다. 또한 토법로를 가동하기 위해 엄청난 벌목이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많은 산림이 파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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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법고로

土法高爐



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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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건국 이후 여러 부문에서 소련을 벤치마킹하는 정책을 폈고, 마오쩌둥도 짧은 기간에 후진농업국에서 선진공업국으로 탈바꿈한 소련의 발전 경로를 따라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에 따라 소련에서 많은 원조를 받고, 소련의 기술자들을 고용해서 개발계획을 실시했으나 흐루쇼프가 취임하고 서방과의 화해를 추진하는 등 변화가 일자 소련과의 관계가 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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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무려 9천만명이나 되는 농민들이 동원되었다. 문제는 농민들이 강철이란 것을 직접 생산해 본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즉, 강철을 만드는 데 필요한 철광석이나 석탄 같은 것을 어디서 구하는지조차 모른다는 것이다. 애초에 그게 가능했다면 대장장이들이 전문가로 대접받지 못했을 것이다.그리고 옛날에는 강철만드는게 국가기밀에 속해있었고, 강철을 만들기 위해선 철의 적절한 비율의 탄소를 주입해야하는데 이것이 매우 까다로워서 대장장이들이 전문가로 대접받은거다. 그게 가능하면 비싼 돈 들여서 공장짓고 용광로를 만들리가 없지?


하지만, 높은 곳에서 명령이 내려왔으니 무조건 일을 해야 하는 입장. 일해라 핫산 결국 농민들은 고철들을 주워다 토법고로에 집어넣었다. 나중에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각종 농기구와 트랙터 같은 농기계들도[1] 토법고로행. 여기에 인민공사가 설립되자 개인들이 식사를 준비할 필요가 없어졌다며 집에서 쓰던 식기구들도 토법고로에 집어 넣었다. 그래도 모자라면 양철지붕까지 뜯어냈다. 한마디로 말해서 억지로 고철을 만드는 것도 모자라 금속 조각이면 되는대로 용광로에 넣은 것이다.



2. 후폭풍


문제는 이렇게 제철의 ㅈ자도 모르는 농민들을 억지로 굴려서 중세도 아닌 고대 수준의 원시적인 메커니즘을 가진 괴(怪)철로로 녹이는 것이었으니 나온 철이 '가축의 똥덩어리'라 불릴만큼 쓸모없는 똥철이라는 점이다. ....


그나마 가축의 분뇨는 비료라도 만들 수 있지, 이런 똥철은 그 자체로는 전혀 사용할 용도를 찾을수 없는 쓰레기 그 자체였다. 게다가 똥철의 비중도 압도적이라서 만들어진 강철이라고 부르는 산물 중 99%가 똥철이고, 1%가 그나마 쓸 수 있는 강철이라 나머지는 다시 재처리해야 했다. 게다가 재처리하려면 제대로 된 거대한 용광로에서 비싼 연료를 사용해서 녹인 다음에 불순물을 제거해야 하는데, 그 비용도 엄청나게 들 뿐더러, 이렇게 해도 워낙 불순물의 종류가 많고 양도 엄청나서 재처리한 강철도 일반적으로 만들어지는 강철보다 모든 면에서 뒤떨어지는 저급 강철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철광석을 돈들여서 쓰레기로 바꾸는 데 가장 특화된 방법이었다. 하다못해 그냥 철광석을 팔아서 강철 사는게 더 효율적일 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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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신나간 순환에 더하여, 괴철로의 불을 피우기 위해 인근 산천의 나무란 나무들을 모두 벌목해 땔감으로 썼으며, 그래도 모자라자 과수원의 과수들까지 싸그리 벌목해 땔감으로 썼다. 때문에 이렇게 생겨난 민둥산들은 비가 오면 토사가 씻겨나가 산사태를 일으켰다.자연은 무슨 죄?! 마오가 통치하던 곳 있었던 게 죄다.


설상가상으로 토법고로는 마오쩌둥이 망상한 것과 달리 100% 완벽하게 돌아가더라도 크기가 작고 사방에 흩어진 관계로 효율성이 꽝이었다. 당장 연료만 생각하더라도 큰 용광로 1기를 가열할 연료로는 토법고로를 몇 기 돌리지도 못할 뿐더러, 토법고로는 크기가 작기 때문에 쉽게 열을 대기 등에 빼앗기므로 온도 유지를 위해 큰 용광로보다 더 많은 연료가 필요하다. 그래서 산림파괴가 더욱 가속화되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문제는 9천만 명에 달하는 농민들이 농사를 포기하고 고철을 찾아 돌아다녔다는 점이다. 때문에 가을이 되어 추수를 해야 하는데도 하라는 추수는 안하고 모두 고철 찾아 돌아다니느라 논밭의 작물들을 그냥 썩혀버렸다. 농작물은 무슨 죄

한마디로, 그냥 철광석 팔고 나무 냅두고 9천만 농민을 삽질시키는 게 이짓거리보다 수십 배는 효율적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병신짓들의 향연과 적절한 자연재해로 대약진 운동 기간 굶어죽은 사람들은 3천만~5천만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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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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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에 제가 김일성과 함께 중국에 방문했는데, 그 때가 한창 인민공사를 할 때였습니다. 밥도 공짜로 먹고 이발하는 것도 전부다 공짜로 했습니다.

모택동이 말하기를 경지면적을 1/3로 줄이고, 1/3은 공원으로 만들고, 1/3은 목장으로 만들어도 쌀이 남아돈다고 했습니다. 그 비결은 깊이 갈고 빽빽하게 심는, 심경밀식이라고 했습니다.

농업담당 중앙당 비서에게 금년에 얼마나 생산했냐고 물어봤더니 5억톤이라고 했습니다.



다음 해에 우리 중앙당으로 중국 고위인사가 찾아왔기에 생활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말도 마십시오. 아사자가 너무 많아 내다 파묻을 수가 없어서 집 앞에 그냥 묻고 있습니다. 어떤 큰 부락들은 인구가 1/5로 줄었습니다. 쌀을 1억8천7백만톤 밖에 생산 못했습니다.”


모두 밭에 나가서 낮잠만 자고, 심지어는 살구도 따서 같이 나눠먹을 바에는 차라리 살구나무를 찍어서 불이나 쬐자고 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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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년 만에 영국을 따라잡고, 15년 만에 미국을 이기자!'(超英干美)' ....... ]



'대약진' 운동에서 배운다


한인희 대진대 중국학과 교수

2009.01.09



[中國探究]<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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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약진' 운동은 중국인들의 일반적인 성격인 '만만디'라는 본래의 느린 기질과는 달리 급속하게 사회주의 사회를 성공시키고자 추진하였다. 그렇게 해서 내건 슬로건이 '10년 만에 영국을 따라잡고, 15년 만에 미국을 이기자!'(超英干美)'였다. 이렇게 시작된 '대약진' 운동은 모든 가치를 '많이, 빨리, 잘하고, 절약하자(多, 快, 好, 省)'에 두고 중국의 '고속발전'을 추구하자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대약진' 운동은 중국국가 통계국의 공식자료에서도 지적하듯이 2,680만 명이 기아로 사망하는 최악의 사태를 경험하였다. 또한 절대 권력자 마오쩌뚱이 권력 2선으로 물러나는 결과도 초래하였다. 더욱이 이 운동의 결과는 중국 현대사에서 '대동란'이라고 부르는 '문화대혁명'을 가져오게 된 씨앗을 잉태하게 된 배경이기도 했다. 이렇듯 지도부의 정책적 실수는 중국 정치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렇다면 마치 '광란의 시대'를 연상하는 '대약진' 운동의 어처구니없는 정책의 예를 몇 가지 들어보자. 이러한 정책이 실시될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국민의 문맹율도 일조하였다.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장제스(蔣介石)도 자신이 실패의 원인을 중국인들의 문맹에 두고 있다는 점도 같은 맥락이다. 실제로 공산혁명이 성공한 1949년의 중국인들의 문맹률은 80%에 달하였고, '대약진' 운동을 거친 뒤인 1964년의 일부 조작된 통계수치로도 문맹률이 52%에 달해 국민의 절반이 문맹이었던 시기였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맹목적으로 추진되었다고 평가받는 '대약진' 운동의 몇 가지 에피소드를 살펴보자.


먼저 '4대 해충(쥐, 참새, 파리, 모기)' 제거운동이다. 이 가운데 참새잡기는 중국과 세계적으로 전무후무한 운동이었다. 당시 6억 7천만 인구 중에 누군가 이러한 생각을 했다. 계산은 한 쌍의 참새가 일 년에 부화할 수 있는 새끼는 약 10-40마리라고 추정하자. 만약 한 마리가 일 년에 4근(1근은 500그램)의 식량을 소모한다면 한 예로 쓰촨성 인왕현에 살고 있는 참새를 320만 마리로 가정할 때 매년 1,280근의 양식을 소모한다. 그런데 한사람이 일 년 평균 400근을 소비한다고 가정하면 이들 참새가 소모하는 양식은 결국 중국인 3만 2천명이 일 년을 먹을 수 있는 양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소식이 방송되자 전국적으로 참새를 잡기 운동이 대대적으로 펼쳐진 것은 불문가지였다.



이 운동은 1958년 2월 중국 쓰촨성 치옹라이현을 필두로 참새와의 전쟁이 이루어졌다. 이 현에서는 처음 한 사람 당 참새 30-50마리를 잡도록 할당했다. 이렇게 되면 2년 뒤 한 마리의 참새도 없는 현이 된다는 계산이었다. 그들은 148개 전투지역을 확정하고 모두가 참새 잡이에 나서 구체적으로 218,007명이 이 사업에 참가하였다. 이 과정에서 세 명이 다치자 '영광스런 희생'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이들의 경험은 전국으로 방영되었고 수도 베이징까지 영향을 미쳤다. 1958년 4월 19일 역사 명소인 천단(天壇) '전투지역'에서 하루에 966마리 참새를 잡는 성과를 얻었다고 공식 보도하였다. 아이들은 나뭇가지로 만든 새총으로, 국민들은 꽹가리를 치고 소리를 크게 지르면서 참새 잡이에 몰두하였다. 참새 잡이 운동은 이렇게 밤낮없이 진행되었고 잡은 참새는 검사를 받고 한 곳에 모아 모두 태웠다.



벼농사와 관련해서도 재미있는 내용이 있다. 어느 간부가 이렇게 말했다. "벼를 심으면서 왜 칸을 넓게 심는가? 벼와 벼 사이를 촘촘히 심으면 한 줄을 더 심을 수 있고 수확이 배로 늘어나지 않겠는가?" 이러한 의견도 훌륭한 정책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정책의 결과 벼와 벼 사이에 바람이 통하지 않고 되었고 벼들이 썩게 되면서 때마침 강한 바람이 불자 모두 쓸어져버려 벼농사는 전국적으로 망치게 되었다. 농업국가인 중국이 수 천 년 간 지어온 농사의 지혜를 캠페인식 정책 때문에 잊어버렸던 것이다. 결국 벼농사는 망했고, 양식이 없는 국민들은 굶어죽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더해 참새 잡이로 천적이 사라진 논에는 해충이 들 끌어 농사는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대약진' 운동의 핵심 정책이었던 철강생산도 주먹구구식 이었다. 이 정책이 채택되자 전 국민은 집집마다 소형 용광로를 갖추고 철강을 생산하게 되었다. 중앙정부는 영국과 미국을 이기려면 철강 생산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 집집마다 국민들 모두가 용광로를 만들고 대대적인 철강 생산 사업에 전 국민이 동원되었다. 정부 선전에 흥분된 어느 부인은 남편과 경쟁까지 하면서 밤잠을 설쳐가며 어떻게 하면 이 사업을 잘할까 고민하였다. 그녀가 찾아낸 방법이 흙으로 만든 용광로가 불길에 터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잘라 흙에 섞어 바르는 것이었다. 그러자 정말 사나운 불길에도 용광로가 터지지 않았다. 그러자 많은 여자들이 모두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자르는 현상도 나타났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여 생산한 철강제품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제품이었다. 그런데 수치상으로 1959년 전 세계의 철강생산의 1위가 중국이었다는 아이러니는 무엇으로 설명할까? 이렇게 전 국민이 철강 생산을 하는 과정에서 용광로에 사용할 연료는 어디서 해결했을까? 이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의 모든 산의 나무들이 잘라져 나갔다. 그 결과 민둥산이 된 산은 산사태가 나는 것도 당연한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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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57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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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e birth


1957 21691000

1958 19088000
1959 16504000
1960 13915000
1961 11899000

1962 24640000
1963 29593000








1966.8.5.


『자본주의 노선을 따르는 권력파의 사령부를 포격하라』



1966. 8월 5일 모택동 자신이 쓴 『자본주의 노선을 따르는 권력파의 사령부를 포격하라』는 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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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혁과 함께 홍위병조직이 공식화한 것은 1966년 8월 칭화(淸華)대 부속중학 홍위병들이 마오에게 편지와 '조반정신' 을 논한 두장의 대자보를 보내고 마오가 이를 지지하는 답서를 보내면서였다.

마오는 그 답서 속에 '조반유리(造反有理.반동파에 대한 그대들의 조반은 옳다)' 라는 유명한 문구를 넣었다.



8월 18일 천안문에서 1백만명의 홍위병을 만난 것을 시작으로 마오는 그해 11월 하순까지 모두 여덟차례 1천만명이 넘는 학생.교사.홍위병들을 접견했다.

그때부터 홍위병들은 거칠 것이 없었다. "사령부를 폭격하라" 는 마오의 지시에 따라 그들은 수정주의자로 몰려 있던 국가주석 류사오치 일파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劉가 부인 왕광메이(王光美)와 함께 홍위병들에게 끌려간 것은 67년 여름이었다. 그로부터 이어진 무수한 구타와 고문으로 劉는 잠깐 사이에 폐인이 돼버렸다.

몸이 너무 망가져 "음식이 있어도 입에까지 가져갈 수 없고 옷을 입는데 두시간, 식당까지의 짧은 거리를 걷는 데도 한시간이 걸렸다" 고 한다.


69년 10월 베이징(北京)에서 허난(河南)성 카이펑(開封)으로 옮겨진 劉는 그후 한달도 못돼 지하감방의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알몸을 누인 채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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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미국 대학 교수인 선판(沈汎)은 1966년 여름 열두살 때 베이징의 홍위병이 됐다.



‘나는 꼬마 혁명가 노릇을 하면서 온갖 잔인한 파괴 활동에 참여했다. 돌이켜보면 스스로 경악을 금할 수 없고,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로 남을 것이다. 위대한 지도자? 이름 없는 혁명 투사? 나는 솔직히 그냥 잘되고 싶었다.


우리 코흘리개들이 전(前) 군사령관을 고문했고, 그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 빨리 죽어 화가 났다. 사람들의 팔다리 상처를 꼬챙이로 쑤시면서 죄책감은 없었다. 동네 의사 집을 박살내고, 그 의사를 끌고 가 수술용 칼로 배를 가르고 뱃속에 간장을 부었다. 모택동 주석이 하사했다는 과일을 앞에 두고 수천명이 절하며 울음바다가 됐다.


그런데 어느 날 홍위병 친구들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홍위병 누나가 반동분자가 돼 7년 중노동형을 받았다. 망치(별명)는 고문을 당해 두 다리를 잃었고, 참새(별명) 아버지는 배신자가 돼 죽었다. 캥거루(별명) 가족 전체가 실종됐고, 내 이모부도 홍위병의 강철봉에 맞아 즉사했다. 마침내 군인인 우리 아버지도 반동분자로 찍혔고, 어머니는 발작을 일으켰다. 우리는 도망쳐 온 이모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의 자서전에 나타난 문화혁명은 지옥이었다.



모택동은 대약진운동으로 3000만명의 중국인을 굶겨 죽였다. 방향을 바꾸자는 움직임이 일어나자 문화혁명을 일으켜 숙청했다. 수백만명이 죽거나 다치고 박해를 받았다. 나중에 중국은 문화혁명을 ‘대재난이자 내란’으로 공식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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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6/12/12/2006121202208.html

[양상훈칼럼] 리영희와 '우상과 이성'
2006.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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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이코노미스트는 반세기 전 열여섯 살 홍위병 장훙빙의 참회를 소개했다. 그는 마오를 욕하는 어머니를 밀고했다며 어머니는 무차별 구타를 당한 뒤 사형당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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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분을 강제로 먹이며 ‘똥보다 더 더러운 계급’이라는 모욕을 줬다. 다음날 그는 스스로 목숨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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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가 ‘계급의 적’으로 찍히게 된 건 친척의 밀고 때문이었다. 어느 날 근무하던 학교의 당 지부 서기로부터 긴급호출을 받아 갔더니, 서기가 냉랭한 표정으로 이렇게 묻더라는 것이다. “내가 왜 불렀는지 아시오? 뭐 찔리는 게 있을 텐데…. 당신은 계급의 적이야!” 시어머니는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 당 지부 서기와 그 주변에 있던 다른 학교 관계자들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시어머니에게 그들은 마치 ‘사형선고’를 내리는 저승사자와도 같았다.


시어머니가 ‘반동계급’으로 찍힌 것은 시어머니의 생부가 ‘해방’ 전 마을의 지주였기 때문이다. 10살이 채 되기 전에 친아버지를 여윈 시어머니는 그 뒤 개가를 한 엄마를 따라 양부 집에서 성장했고, 성도 양부의 성으로 바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런 사실을 조직에 밀고한 사람은 다름 아닌 시어머니의 친척이었다. 평소에 시어머니를 시샘하고 질투하던 그 친척은 문혁이 일어나자 생부의 ‘과거’를 밀고해서 시어머니를 하룻밤 사이에 ‘계급의 적’으로 만들어버렸다. 그 뒤 문혁이 끝날 때까지 시어머니의 인생은 말 그대로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한 편의 드라마다.


당시 시어머니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고 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변에서 자신처럼 ‘계급의 적’으로 찍힌 다른 사람들 중에는 비참하게 죽은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죽임을 당하지 않으면 모욕감에 견디다 못해 자살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자신의 동료였던 한 남자 교사도 ‘반동계급’으로 찍혀서 홍위병들이 온갖 수모를 주었는데, 어느 날 그에게 인분을 강제로 먹이며 ‘똥보다 더 더러운 계급’이라는 모욕을 줬다. 다음날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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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legacy.h21.hani.co.kr/section-021005000/2006/05/021005000200605250611013.html

2006년05월25일 제611호
당신은 계급의 적이야… 적이야… 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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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혁 기간 동안 벌어진 사상자의 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11], 1966년~1969년의 문화 대혁명의 혼란이 극도에 달했을 시기에, 50만명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사인방의 재판에서 중국의 법원은 문혁기간중 729,511명이 박해를 받았고, 이 중 34,800명이 죽었다고 발표했다.[39] 그러나 많은 죽음이 보고 되지 않았고, 경찰이나 지방 당국이 숨겼기 때문에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다. 또한 중국 당국은 이를 위한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가는 것을 꺼려왔다.[40]


최근의 한 연구에 의하면 농촌에서만 360만명이 박해받았고, 그중 750,00명에서 150만명이 사망하고, 비슷한 숫자가 부상당했다고 추정된다.[41] 영국에서 활약하는 중국 작가 장룽(중국어 정체: 張戎, 병음: Zhāngróng, 영어식 표기로는 Jung Chang) 쓴 마오의 전기(In Mao: The Unknown Story) 에서는 문혁기간중 300만명이 사망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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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중국



[ ...... 일요일은 없고 휴일이라곤 1년에 3일뿐 .........

...... 저녁을 먹고 나면 .... 생산계획을 토의하고 모택동사상강좌를 .........


..... 벼농사도 지었으나 쌀밥은 한톨도 먹어보지 못했으며 주식은 옥수수, 수수, 좁쌀과 감자 .......

..... 봄철과 가을철에 남루한 의류 한벌씩 사고 나면 빈털터리 ........... ]




야만인생활 25년 - 중공서 돌아온 일인가족이 폭로


매일경제 1970.8.19



외계단절 잡곡으로 연명
쉰다는 명절도 모사상 고취로 들볶고
1년 혹사댓가가 누더기 한벌


중세농노를 방불케 하는 중공치하의 인민공사내의 생활실태가 최근 귀국한 전일본개척민에 의하여 밝혀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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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림노파일가가 있던 곳은 흑룡강성 방정현의 보흥공사라는 30가구를 수용한 소규모의 집단농장, 수소폭탄을 실험하고 동방홍 인공위성을 궤도에 올리는 등 군사면에서의 발전과는 멀리 전기도 경운기도 없는 반원시적 농업집단이라고 했다.


이곳 남녀농군들에게 있어 시간관념은 태양. 날이 새면 농장에 나가 일하다가 해가 져 곡물과 잡초의 분간을 할 수 없을만큼 캄캄해진 다음에야 집으로 돌아온다. 저녁을 먹고 나면 고단한 몸을 쉬지도 못하고 야회에 나가 내일의 생산계획을 토의하고 모택동사상강좌를 받아야 한다.


일요일은 없고 휴일이라곤 1년에 3일뿐 정초와 단오절 추석에 하루씩 쉬는 것뿐인데 쉬는 날은 모택동사상 고취와 생산책임량 증대를 위한 행사 등으로 가만히 버려두지 않으므로 실제로 쉬는 날이란 하루도 없는 것이다.


벼농사도 지었으나 쌀밥은 한톨도 먹어보지 못했으며 주식은 옥수수, 수수, 좁쌀과 감자. 1년의 농사가 끝나면 각기의 생산량에서 공출책임량과 배급용식량을 빼고 남은 것을 현금으로 환산하여 받게 되는데 봄철과 가을철에 남루한 의류 한벌씩 사고 나면 빈털터리.


병에 걸리면 죽는 날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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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벌써 농촌은 물자 고갈로 입을 것, 신을 것이 없었다”고 회고하고 있는 1970년대 중반, 성혜랑은 조카 김정남의 교육을 위해 ‘가정교사’로 김정일 관저 생활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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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 북한


[ ...... 산모가 쌀밥은 구경도 못해 젖이 안나온다 .......

...... 두부 생선 등은 볼 수도 없으며 돈은 소용도 없으니 헌옷 가지를 보내 달라 ........ ]



후회에 찬 비참한 나날 북송일인처들 편지로 참상 폭로


매일경제 1974.5.6.



산모가 쌀밥 구경도 못해
43세에 이미 백발돼버려
돈도 소용없으니 헌옷 보내달라



한국인 남편을 따라 북송선을 타고 북괴에 간 일본 여인들의 참상이 드디어 일본사회에서 처음으로 공개되어 뒤늦게 충격을 던지고 있어 내외에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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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통의 편지내용을 간추려 보면 산모가 쌀밥은 구경도 못해 젖이 안나온다. 본국서 보내준 조미료를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43세에 이미 백발이 되어 버렸다. 두부 생선 등은 볼 수도 없으며 돈은 소용도 없으니 헌옷 가지를 보내 달라. 보내줬다는 사카란 5kg이 없으니 웬일이냐 . 4살짜리 꼬마는 아침부터 밤까지 책만 보는데 그것도 그림책 같은 것이 아니고 공산주의 서적들 뿐이다. 지금 청년돌격대에서 일하고 있다. 하루 빨리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되기를 빈다는 애절한 호소로 넘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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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12.28. 저우언라이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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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매우 불행하다. 건국 26년인데 6억 인구가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있다.

공산당만 노래하고 지도자 찬양만 하는데 이것은 공산당 실패의 한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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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혁 10년간 중국은 약 5000억 위안(약 100조 원)의 국내총생산(GDP) 손실을 본 것으로 추산됐다.

이는 중국 건국 이후 30년간 투자한 기초 인프라 건설비의 80%에 이르는 막대한 금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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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만두를 배불리 먹고 싶어 작가가 됐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어린 시절 중국 경제는 매우 곤궁했다. 배고픔과 분리된 유년은 떠오르지도 않는다. 먹는 걸 주 소재로 다룬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인생에서 처음 배불리 먹은 기억이 열여덟 살 때다. 부역에 동원돼 만두 여덟 개를 먹었다. 뱃가죽이 늘어지도록 먹는 게 소원인 건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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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1월부터 5월까지 15만 명이 홍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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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소평이 개혁개방한 것만 알지, 사람들은 왜 그가 그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것은 다름 아닌 홍콩의 진실을 더 이상 감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목숨을 걸고 홍콩으로 도망간 사람들이 몇 달만 있으면 중국 고위 공산당 간부보다 부자가 되어 돌아왔다. 그렇게 되자 아무리 강제수용소에 집어넣어도 소용없었다.

노동자, 농민, 어린 학생만이 아니라 공산당 간부도 도망갔다. 1979년 1월부터 5월까지 15만 명이 홍콩으로 넘어갔다.



2012년 중국의 국가주석으로 내정된 습근평(習近平)의 아버지 습중훈(習仲勳)이 당시 광동성 당서기였는데, 그도 처음에는 고리타분한 소릴 했으나 휘황찬란한 자본주의 마천루와 꾀죄죄한 공산주의 어촌을 번갈아 보며 강제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을 찾아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그는 홍콩 맞은 편 곧 당시 보안(寶安 현재 심천)을 경제특구로 개방하지 않으면 해결책이 없다고 확신하고 등소평에게 건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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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12.18. 중국 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



[ ....... 쥐를 잡는데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상관없다 ........ ]


[ ...... 마오쩌둥이 늘 강조 .... 문화대혁명 당시 크게 유행했던 자본주의 사상은 뿌리째 뽑아야 한다는 '잡초론' .......... ]



중국의 개혁. 개방 - 중국 경제개혁의 총설계사 덩샤오핑


2007-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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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덩샤오핑은 마오쩌둥 등과 함께 대장정을 한 중국 공산당의 원로입니다. 덩샤오핑은 1950년대 중반부터 중국 대외정책과 국내정치 면에서 중요한 정책 결정자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경제를 중요시 하는 실용주의 노선을 주장하다가 마오쩌둥과 갈등을 빚어 두 차례나 실각하기도 했습니다.

1933년 장시성 당서기직에서 물러난 것이 첫 번째였고, 1966년 대약진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실용주의 노선을 주장하다가 마오쩌둥과 갈등을 빚어 해직된 것이 두 번째 실각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1977년 다시 복권되자마자 이듬해인 1978년 12월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제 11기 3중전회의에서 유명한 '흑묘백묘론'을 외치며 다시 개혁.개방을 주장하고 나선 것입니다.


덩샤오핑 지금 결심해야 하는 이 일 (경제개혁)은 전쟁 외에 시종일관 이 일을 관철해야 하고 전쟁이 일어나면 전쟁이 끝난 후에 돌아와 계속해야 하고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이 일을 중심으로 해야 하며 어떤 관여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덩샤오핑은 앞서 두 차례 실각 경험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마오쩌둥의 뒤를 이은 화궈펑 주석과 맞서 경제개혁을 주장했다는 것은 그에게 얼마나 확고한 의지가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덩샤오핑을 '중국 경제개혁의 총설계사'라고 말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오랫동안 중국의 지도이념이었던 마오쩌둥의 사상을 종결하고, 경제중심의 '흑묘백묘론‘을 새로운 지도 이념으로 정착시킨 데 있습니다.


비록 마오쩌둥이 사망했다고 할지라도 그 때까지만 해도 중국인민들 사이에서는 마오쩌둥은 신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따라서 마오쩌둥이 늘 강조했던 혁명과 정치투쟁, 특히 문화대혁명 당시 크게 유행했던 자본주의 사상은 뿌리째 뽑아야 한다는 '잡초론'은 중국인민들의 생활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마오쩌둥의 영향력이 아직 크게 남아있는 당시 상황에서, 덩샤오핑은 탁월한 지도력과 현실적인 정책을 통해 사회적인 혼란 없이 빠르게 개혁. 개방 정책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당시 덩샤오핑이 내세웠던 '흑묘백묘론'이란 그의 고향인 쓰촨성의 속담에서 나온 말인데 쥐를 잡는데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즉 덩샤오핑은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는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상관없다며 중국 특색의 개혁. 개방 이론을 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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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 제 11기 3중전회의에서 결정된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을 발판으로 본격적인 개혁. 개방의 길로 들어섰고, 지금까지 중국의 개혁. 개방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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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rfa.org/korean/weekly_program/china/dung_xiaoping-20070104.html








주간 기획 “중국 경제 개혁과 교훈” - 개혁의 배경


2005-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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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중국인 우리는 당시 고등학생이었는데 덩샤오핑이 다시 집권하자 베이징에서는 큰 환영 행사가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76년 이전 적어도 두 번 이상 권력에서 밀려났었던 덩샤오핑은 중국 경제를 어떻게 이끌어갈 지 아는 자오쯔양과 후야오방 같은 인물을 등용해 개혁 정책을 주도해 나갔습니다. 그 결과 베이징 주민들의 생활수준도 80년대 들어 크게 좋아졌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마침내 지난 1977년 복권돼 정치 일선에 나선 덩샤오핑은 중국의 경제발전을 방해하는 모든 제도나 방법을 과감히 개혁해 나갔습니다. 그 방향은 간단히 말해서 공산주의식 계획 경제를 축소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그의 유명한 말이 바로 ‘흑묘백묘론’입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말로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경제만 발전하면 된다, 다시 말해 어떤 방식으로라도 중국 사람들이 보다 잘 먹고 잘 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그는 ‘선부론’이라고 해서 일부 중국 사람들, 해안에 면한 상하이 등 대도시 사람들이 먼저 부자가 되는 것을 인정하고 내륙의 가난한 사람들이 이를 따라 배우게 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중국 사람들 사이에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격차가 좀 생기더라도 이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덩샤오핑의 개혁 사상의 핵심은 ‘실사구시’였습니다. 그는 모두가 가난해지는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무기 생산에 주력한 중공업 우선 정책과 문화대혁명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중국의 경제 살리기를 지상 목표로 설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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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rfa.org/korean/in_focus/chinese_economy-2005041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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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03.29 동아일보 3면


人民日報(인민일보) 社說 通(사설 통)해 毛(모), 鄧小平(등소평)을 直接非難(직접비난)




人民日報(인민일보) 사설은 "黨主席 毛澤東(당주석 모택동)이 최근 이사람(鄧小平(등소평))은 계급투쟁의 意義(의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며 아직도 「白猫黒貓論(백묘흑묘론)」을 주장함으로써 제국주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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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12.25. [ ...... ‘우리 식대로 살아나가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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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운데 북한 특유의 사회주의 건설노선과 방식을 상징하는 ‘우리 식대로 살아나가자!’는 구호가 21세기 북한을 향도하는 전략적 구호로 다시금 제기돼 시선을 끌었다.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및 내각 기관지 민주조선은 최근호(2.28)에 게재한 장문의 논설에서 희망찬 21세기 사회주의 붉은기 진군길에 들어선 오늘 우리 당은 '우리 식대로 살아나가자!'라는 전략적 구호를 변함 없이 높이 들고 나갈 것을 중요하게 강조하고 있다고 역설했다. 민주조선은 이것이 김정일 위원장의 생각이자 의도임을 밝히고 김 위원장의 발언을 적시했다.


우리는 새 세기에도 모든 것을 우리 식대로 해나가야 합니다. '우리 식대로 살아나가자!' 이것은 우리가 새 세기에도 변함 없이 높이 들고 나가야 할 전략적 구호입니다.

민주조선은 우리 식은 곧 주체 식이며 이보다 더 좋은 투쟁방식, 투쟁구호는 없다고 지적하면서 ‘나에게서 그 어떤 변화도 바라지 말라!’는 김 위원장의 언급을 환기시켰다.



북한에 “우리 식대로∼” 구호가 처음 등장한 것은 20여년 전의 일. 김 위원장은 1978년 12월 25일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선전선동부 책임일꾼협의회에서 연설을 통해 ‘우리 식대로 살아나가자!’는 구호를 제시했다. 중국이 개혁·개방 노선을 결정한 중공당 제11기 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11기 3중전회)가 1978년 12월 18일부터 23일까지 열렸고 바로 그 이틀 뒤인 25일 김정일 위원장의 입에서 ‘우리 식대로∼’ 구호가 나왔다는 것은 구호의 의미와 맥락이 어디에 닿아있는지를 설명해준다.


‘우리 식대로∼’는 그로부터 10여년 뒤 소련의 해체와 동구 사회주의 붕괴라는 20세기 말 ‘사회주의 대지진’의 와중에 새로이 부활해 널리 고창됐다. 사회주의 붕괴라는 역 도미노현상의 파고가 사회주의 동방초소(북한)에 밀어닥칠 것을 우려한 본능적인 방어의 작동이라고 할까. 그로부터 다시 10여년 뒤, 21세기의 문을 여는 길목에서 ‘우리 식대로∼’는 마치 10년 주기의 경기법칙처럼 어김없이 소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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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8년 기준 .... 한국은 3천6백 달러로 30위 .........

..... 중국(3백30) 인도(3백40) 등은 하위권을 ........... ]



한국 1인 GNP 30위

매일경제 1990.7.17.


한국 1인 GNP 30위
88년 3천600불 ... 국방비율 최고수준
인구증가율 1% 이하

세계은행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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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은이 16일 발표한 '세계개발보고 1990'에 따르면 .... 1인당 GNP는 88년 기준으로 스위스가 2만7천5백 달러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일본 2만1천20달러,..... 한국은 3천6백 달러로 30위를 차지했다.

..... 중국(3백30) 인도(3백40) 등은 하위권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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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5년부터 이미 북한경제가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 .......

..... 1986년 이후부터 급격히 악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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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통계에는 별로 흥미를 갖지 않았으나, 북한경제가 계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당국은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김일성에게 허위사실을 보고하고 외부에도 각종 통계를 왜곡시켜 발표해왔다.


그러나 문서정리실에 남겨진 정확한 통계로는 김정일이 후계자로 떠오른 무렵인 1975년부터 이미 북한경제가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특히 김정일이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 1986년 이후부터 급격히 악화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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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 ..... "무시무시한 생지옥 남조선으로 간다면 차라리 물에 빠져 죽겠다" ....... ]



[ ..... "공화국 북반부와 남반부를 대비하여 볼 때 거꾸로 되어 있는 것 같다" ...... ]

[ ...... "남조선에서는 간장 된장을 마음대로 만들어 먹을 수 있다니 지금까지 헛살아 왔다" ........ ]



1987.2.11. 경향신문

김만철씨 일가 남쪽여로 25일 3





[ ...... 거울을 볼 시간 없이 .... 매일 쫓기고 ...... 시집올 때 가져온 삼면경이 깨진 뒤 손거울조차 없이 ......... ]


[ ..... 『북한에서는 이밥(쌀밥)을 실컷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 ]



김일성 생일선물

[중앙일보] 1987.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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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생활소감을 한마디만 더하라면 나는 서울사람들이 너무도 북한의 실상을 모른다는 점을 말하고싶다.

서울시민들은 내가 『북한에서는 이밥(쌀밥)을 실컷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말하면 대부분 『설마 그럴 리가?』 하는 눈으로 쳐다보곤 했다. 그럴때면 안타깝기 그지 없다.



이 얘기 또한 믿기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나는 서울의 호텔에서 첫날밤을 맞았을때 수세식화장실 사용법을 몰라 당황했었다.

북한의 주택은 공동주택이다. 방2칸, 부엌1칸씩을 하모니카처럼 엮어놓았다. 인민반 (30가구)마다 설치된 화장실은 겨우 2칸. 물론 재래식이다. 30가구 1백50여명이 사용하는 화장실이 2칸뿐이니 어려운 점이 한두가지 아니다.



목욕탕 사정도 한심하기 이를데없다.
청진시내에는 각구역별(인구5만∼10만) 로 공동목욕탕이란 것이 있다.
그러나 연료사정 때문에 대부분 개점휴업상태다. 1주일에 한번(일요일) 문을 여는데 그날이면 목욕탕은 콩나물시루가 된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목욕탕사용을 아예 포기하고 집에서 가마솥에 물을 끓여 몸을 씻는다.



생필품 공급사정도 엉망이다. 세탁비누의 공급량은 연간 5장. 6개월도 채못돼 바닥이 난다. 주민들은 아직도 명태·정어리기름등에 가성소다를 섞고 이를 끓여 비누를 만들어 쓴다. 이때문에 주민들의 옷에는 항상 쾌쾌한 비린내가 배어있다.


그러나 당간부들은 사겅이 다르다. 북한에는 「8·9호제품생산기업소」가 있다. 당간부들에게 특별공급하는 식품·피복·생필품등을 전문생산하는 공장을 말한다. 또 이 기업소 노동자만을 특별검진하는 「8·9호검진대」란 것도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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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2095935&ct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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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나이어린 광호군과 광숙양은 국대신 물에다 밥을 말아 순식간에 그릇을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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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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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렇다면 월 평균 공장 가동률이 절반도 못 된다는 소리가 아닙니까?”

“30~40%로 돌아가면 잘 돌아가는 거지요. 외교관들이 부럽습니다.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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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88년에 보위부 경비대원으로 입대했다.

나는 북한이 제일 행복한 나라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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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깃덩어리 기름덩어리들이 뒤굴뒤굴 굴러다니는데 개가 안 먹더라고요 ........ ]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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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소 왔소?‘하고 물어보시더라고요.

”예“하고 얘기하는데 목이 꽉~ 매었어요. 조선말 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그런 마음 또는 이제는 살았다 그런 안도감과...하여튼 만감이 교차하며 눈물이 확 나더라고요. 집으로 들어오라 그랬어요. 할머니께서 목욕물 덥혀줘서 목욕하고, 한잠 푹 잤어요.



자고 나니까 할머니가 밥을 했는데, 그때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있습니다. 달걀을 아마 그 할머니가 8알인가 10알인가 삶았어요. 제 마음에는 몇 년 동안 달걀을 못 먹어 봤기 때문에 그걸 다 먹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하나밖에 못 먹었어요.

그때 하나 먹고 수저를 놓으면서 상당히 아쉬웠어요. 하나 더 먹고파. 그런데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못 먹는 곳에서 와서 저렇게 게걸스럽게 여자가 먹는구나!‘ 이런걸 보여주기가 너무 부끄러워서 못 먹고 외소했던 점 그것이 아직도 내 가슴에 박혀있습니다.



그 때 또 하나의 충격은 그 집에 들어갈 때 토방에 철 그릇에 밥덩이하고 고깃덩어리가 있었어요. 그때 그걸 보면서 ‘아! 얼마나 음식이 많이 남았으면’ 변할까봐 밖에 내놓은 줄 알았거든요. 하루, 이틀 그 집에서 자며 알아보니까 그것이 개밥이더라고요. 개를 줄려고 밖에 내놓은 것이었어요. 고깃덩어리 기름덩어리들이 뒤굴뒤굴 굴러다니는데 개가 안 먹더라고요.



그 때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저런 밥을 북한에서는 누가 먹을까? 아마 당 비서나 먹겠지?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어쩌면 당 비서도 하루 세끼는 먹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당 비서는 중국의 개보다도 못하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 때 너무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후에 그 집 사람들이 얘기를 하는데 제가 한 열흘 동안 아무 말도 안하드레요. 하루세끼 먹고 자고 그 다음에 한국 라디오만 듣고 계속 그랬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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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


[ ..... 수령님은 인민들이 흰 쌀밥에 고깃국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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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초부터 북한의 김정일이 쌀밥타령이다. 1월 9일자 노동신문은 김정일이 “수령님은 인민들이 흰 쌀밥에 고깃국을 먹으며 비단옷을 입고 기와집에서 살게 해야 한다고 했는데 우리는 이 유훈을 관철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했다. 김정일은 또 “아직 우리 인민들이 강냉이밥을 먹고 있는 것이 제일 가슴 아프다는 말을 했다”고 지난 1일 노동신문이 전했다.



김일성의 ‘이밥에 고깃국’ 얘기는 지금으로부터 60년도 더 이전에 나온 말이다. 그는 해방 직후 평양에서 가진 첫 군중대회에서 “공산주의란 이밥(쌀밥)에 기와집을 지어주는 것”이라고 외쳤다. 1958년 1월 경공업 부문 열성자회의에서는 “조선의 농민들은 기와집에서 이밥에 고깃국을 먹으면 부자라고 했다”며 “이는 우리 농촌에서 머지않은 앞날에 실현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다 1962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김일성은 “이밥에 고깃국을 먹고 비단옷을 입으며 고래 등 같은 기와집에서 살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6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 대를 이어 지켜지지 않고 있다.


지켜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체제와 제도상 지켜질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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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김정은 "3년내 쌀밥에 고깃국 먹게 할 것"

요미우리 "김일성 위광 배경으로 경제 재건에 지도적 역할 부각"


양정아 기자 | 2010-12-06



북한 김정일의 후계자로 확정된 김정은이 3년 내에 주민들에게 쌀밥에 고깃국을 먹게 해주겠다며, 할아버지인 김일성이 내걸었던 목표를 다시 들고 나왔다고 일본 요미우리 신문이 6일 보도했다.


신문은 이날 북중 관계자를 인용해 "김정은이 11월 초순에 평양에서 열린 한 회의에서 3년 이내에 국민 경제를 1960~1970년대 수준으로 회복시켜 (김일성이 목표로 내걸었던) '흰 쌀밥에 고깃국을 먹고, 기와집에서 비단옷을 입고 사는' 생활수준을 달성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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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 우리식 사회주의가 세상에서 제일이며 이 고마운 제도를 떠나서는 한시도 살 수 없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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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장은 "체제통일의 야망은 실현될 수 없는 개꿈이라는 것을 똑바로 알고 '변화유도'니, '주민의 삶'이니 뭐니 하며 경망스럽게 놀아대지 말아야 한다"면서 "우리식 사회주의가 세상에서 제일이며 이 고마운 제도를 떠나서는 한시도 살 수 없다는 것이 인민의 투철한 신조"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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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60911_0014381085

北 "제재에 위축 안되고 핵탄두 폭발시험…핵공격 능력 과시"
[2016-09-09]








2015.1. 김정은


[ ...... 당의 노선과 정책을 무조건 끝까지 결사관철하여야 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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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것을 귀중히 여기고 빛내어 나가는 여기에 조선민족제일주의가 있으며 내 나라, 내 조국의 존엄을 떨치고 부강번영을 앞당기는 참다운 애국이 있습니다. 당과 수령의 영도밑에 혁명의 전 세대들이 피와 땀을 바쳐 이룩해 놓은 이 땅의 모든 재부들을 소중히 여기고 더욱 빛내이며 높은 민족적 자존심을 지니고 우리의 힘과 기술, 자원에 의거하여 모든 것을 우리 식으로 창조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혁명의 지휘성원들인 일꾼들이 오늘의 총공격전에서 기수, 전위투사가 되어야 합니다. 일꾼들은 숭고한 애국관과 헌신의 각오를 가지고 조국의 부강번영과 인민의 행복을 위하여 멸사복무하여야 하며 스스로 무거운 짐을 맡아 쥐고 대중의 앞장에서 뛰고 또 뛰어야 합니다. 일꾼들은 당의 사상과 의도를 환히 꿰뚫고 대중속에 깊이 들어가 그들을 불러일으켜 당의 노선과 정책을 무조건 끝까지 결사관철하여야 합니다. 일꾼들은 자기부문, 자기단위 사업을 당과 국가 앞에 전적으로 책임져야 하며 패배주의, 보신주의, 요령주의를 철저히 없애고 모든 일을 혁신적으로, 과학적으로 전개해 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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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vop.co.kr/A00000832330.html

2015-01-01
김정은 신년사







[ ..... 원수님을 유일 중심으로 ........

..... 당의 결정과 지시를 결사관철하는 혁명적 기풍을 .......... ]



北, 김정일 당사업 시작 기념 보고대회…“김정은 결사옹위”


2016.06.18



북한은 김정일의 노동당 사업 시작 52주년 기념일을 하루 앞두고 중앙보고대회를 열어 김정은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강조했다.


최룡해 당 중앙위 부위원장은 오늘(18일)평양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보고대회에서 원수님(김정은)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따르며 정치사상적으로 목숨으로 결사옹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고 조선중앙TV가 방송했다.


또 원수님을 유일 중심으로 하는 전당의 사상의지적 통일과 단결을 반석같이 다지며 당의 유일적 영도 밑에 전당, 전국, 전군이 하나와 같이 움직이고 당의 결정과 지시를 결사관철하는 혁명적 기풍을 세워 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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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루아침에 아무 가치가 없는 쓰레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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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공산당 민주혁명 이후에도 가치를 여전히 유지한 물건은 놀랍게도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1970-80년대 소련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가구, 가전제품, 도서 등은 하루아침에 아무 가치가 없는 쓰레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새로운 세계에서 이와 같은 것은 쓸모가 없게 되거나 옛날보다 가격이 엄청나게 떨어졌습니다. 예를 들면 1980년대 초 일본제 칼라 텔레비전은 노동자가 5-6개월 정도 벌 수 있는 돈으로 팔렸는데 1990년대 말 들어와서는 훨씬 더 좋은 텔레비전을 보름 정도 벌 수 있는 돈으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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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rfa.org/korean/commentary/lankov/lankovcu-09222016101122.html

[란코프] 북 체제붕괴 후 잘살기 위해서는
2016-09-22








[ ....... 귀가 먹먹할 정도의 요란한 시동음과 함께, 뿌연 배기가스가 시야를 ......... ]



2013-02-09


과거 동독의 작은 추억...트라비!


[앵커멘트]


과거 동독의 상징 하면 우선 베를린 장벽이 떠오르는데요.

그에 못지않게 유명한 것이 바로 트라비라고 하는 꼬마 자동차입니다. 배기가스가 너무 심해 도로에서는 이미 운행금지령을 받았는데요. 지금은 베를린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특별한 재미를 안겨주는 관광 상품이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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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


귀가 먹먹할 정도의 요란한 시동음과 함께, 뿌연 배기가스가 시야를 가립니다.

작고 요란한 데다, 친환경과는 거리가 먼 트라반트.

그러나 매일 수십 명의 관광객이 비좁은 트라반트에 몸을 쑤셔 넣습니다.

'트라비 사파리'는 관광객이 직접 트라반트를 몰고 한 시간 동안 베를린의 명소들을 돌아보는 투어입니다.

요금은 일인당 79유로, 우리 돈 약 12만원 정도 합니다.



하지만 편안한 자동차 여행을 생각했다면 오산입니다.

트라반트는 요즘 차에 비해 매우 작은 데다, 최고 시속은 112km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매년 3만 명의 관광객이 베를린과 드레스덴에서 '트라비 사파리'를 즐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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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비'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트라반트는 과거 동독에서 생산된 유일한 차입니다.

1957년부터 1991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될 때까지 약 300만 대가 생산됐고 다른 공산권 국가에도 수출됐습니다.



당시엔 이 차를 사려면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차를 주문하고 나서 인도받기까지 길게는 무려 12년이 걸렸고, 이는 공산주의 생산체제를 비판할 때 단골로 인용되곤 했습니다.



독일이 통일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 트라비는 베를린장벽 못지않게 동독의 대표적인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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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악셀 플라이셔, 관광 안내원]

"트라비는 이제 몇 대밖에 남아있지 않죠. 원래는 운행 금지인데 저희는 특별 허가를 받고 베를린에서 마지막 트라비를 운행하고 있죠."



트라비가 도로에서 쫓겨난 이유는 극심한 매연 때문입니다.

독일 정부의 엄격한 환경기준에 전혀 부합하지 않습니다.

매연을 참아가며 관광을 마친 사람들. 얼굴엔 미소가 가득합니다.



[인터뷰:엘레인 보이드, 아일랜드 출신 관광객]

"정말 즐거웠어요. 도시와 유적지를 보는 것도 좋았고, 사람들이 손을 흔들어주니까 더 좋았어요."

파리에서 온 예술가도 무척 만족한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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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어를 마친 운전자들에겐 트라비 운전 면허증이 기념품으로 주어져, 즐거운 추억을 더합니다.


http://www.ytn.co.kr/_pn/0413_201302061702236211








1984.9. 북한 수해물자 지원



[ ...... 이건 돼지 사료로라면 몰라도 .......

…. 이 옷감이라는 것도 보세요. 잘라서 방걸레로 쓴다면 모를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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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9월 남한에서 수재로 인해 1백90명이 사망하고 20만 명의 수재민이 발생했다. 이런 가운데 북한이 9월 8일 쌀 5만섬을 비롯한 구호물품을 제공하겠다고 제의해 왔다. 당시 <노동신문>은 구호활동을 ‘분단 40년 역사 이래 최고의 위업’이라며 대서특필하며 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남한에 도착한 쌀은 쌀이라고 하기엔 질(質)이 상당히 떨어지는 것이었다. 언제 수확한 것인지 색은 변색된 데다가 묵은 냄새까지 풍겨 밥을 지어 먹는다는게 사실상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북한에서 보내온 쌀을 비롯한 구호물품은 북한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남한 사회의 우월성을 상징하는 증거로 활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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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돼지 사료로라면 몰라도 사람이 밥해 먹기에는 도정도 엉망이고 품질 자체가 저질이에요.

…이 옷감이라는 것도 보세요. 잘라서 방걸레로 쓴다면 모를까 이런 천으로 어디 샤쓰를 만들어 입겠어요, 바지를 짓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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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수해물자 "최고품"자랑


[중앙일보] 1985.03.09



관광시켜준 사찰주지는 노동당원|귀환어부 회견 1문1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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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과 만나보았는가.


▲숙소인 여관 종업원들과 접촉했을 뿐이다.

한 지도원이 우리 선원이 입고 있던 캐시밀론 반코트를 보고 남한에서는 이런 것을 마음대로 사 입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작년에 보낸 수재물자는 자기들 물건 중 최고품이라고 자랑하면서 남한 관리들이 물건이 탐이나 중간에 다 빼돌렸을 것이라고 악선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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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983201&ctg=










盧, "존경하는 중국인 마오쩌둥·덩샤오핑"


2003-07-09



[edaily 김진석기자] 노무현 대통령은 9일 중국 명문대학중 하나인 베이징`칭화(淸華)` 대학을 방문, 연설을 하고 학생들과의 질의 응답시간도 가졌다.


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중국 지도자 중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은누구냐`는 한 학생의 질문에 대해 "현역이 아닌 분으로 말씀드리면 마오쩌뚱 주석과 덩샤오핑 주석이다"며 "두 분은 시대를 나눠서 중국의 역사를 새롭게 만들어 오셨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이어 "다만 한 분이 다 하기 벅차서, 그렇게 서로 좀 다르게 나눠서 하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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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18&aid=0000052289












[ ..... 수령님께 모든 운명을 전적으로 의탁하며 수령님의 령도따라 나아가는 ..........


........5.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교시 집행에서 무조건성의 원칙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 ]




북한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 전문

데일리NK | 2013-08-09




1.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혁명사상으로 온 사회를 일색화하기 위하여 몸바쳐 투쟁하여야 한다.

수령님의 혁명사상으로 온 사회를 일색화하는 것은 우리 당의 최고 강령이며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세우는 사업의 새로운 높은 단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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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세우신 프로레타리아독재정권과 사회주의제도를 튼튼히 보위하고 공고발전시키기 위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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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충성으로 높이 우러러모셔야 한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높이 우러러모시는 것은 수령님께 끝없이 충직한 혁명전사들의 가장 숭고한 의무이며 수령님을 높이 우러러모시는 여기에 우리 조국의 끝없는 영예와 우리 인민의 영원한 행복이 있다.


1) 혁명의 영재이시며 민족의 태양이시며 전설적영웅이신 위대한 김일성동지를 수령으로 모시고있는것을 최대의 행복, 최고의 영예로 여기고 수령님을 끝없이 존경하고 흠모하며 영원히 높이 우러러 모셔야 한다.

2) 한순간을 살아도 오직 수령님을 위하여 살고 수령님을 위하여서는 청춘도 생명도 기꺼이 바치며 어떤 역경속에서도 수령님에 대한 충성의 한마음을 변함없이 간직하여야 한다.

3)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가리키시는 길은 곧 승리와 영광의 길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수령님께 모든 운명을 전적으로 의탁하며 수령님의 령도따라 나아가는 길에서는 못해낼 일이 없다는 철석같은 몸과 마음을 다 바쳐야 한다.




3.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권위를 절대화하여야 한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권위를 절대화하는 것은 우리 혁명의 지상의 요구이며 우리 당과 인민의 혁명적의지이다.


1)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밖에는 그 누구도 모른다는 확고한 립장과 관점을 가져야 한다.

2)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정치사상적으로 옹호하며 목숨으로 사수하여야 한다.

3)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의 위대성을 내외에 널리 선전하여야 한다.

4)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절대적인 권위와 위신을 백방으로 옹호하며 현대수정주의와 온갖 원쑤들의 공격과 비난으로부터 수령님을 견결히 보위하여야 한다.

5)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권위와 위신을 훼손시키려는 자그마한 요소도 비상사건화하여 그와 비타협적인 투쟁을 벌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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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혁명사상을 신념으로 삼고 수령님의 교시를 신조화하여야 한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혁명사상을 확고한 신념으로 삼고 수령님의 교시를 신조화 하는 것은 끝없이 충직한 주체형의 공산주의혁명가가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구이며 혁명투쟁과 건설사업의 승리를 위한 선결조건이다.


1)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혁명사상, 주체사상을 자기의 뼈와 살로, 유일한 신념으로 만들어야 한다.

2)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교시를 모든 사업과 생활의 확고한 지침으로 철석같은 신조로 삼아야 한다.

3)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교시를 무조건 접수하고 그것을 자로하여 모든것을 재여보며 수령님의 사상의지대로만 사고하고 행동하여야 한다.

4)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로작들과 교시들, 수령님의 영광찬란한 혁명력사를 체계적으로, 전면적으로 깊이 연구 체득하여야 한다.

5)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혁명사상을 배우는 학습회, 강연회, 강습을 비롯한 집체학습에 빠짐없이 성실히 참가하며 매일 2시간이상 학습하는 규률을 철저히 세우고 학습을 생활화, 습성화하며 학습을 게을리 하거나 방해하는 현상을 반대하여 적극 투쟁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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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교시와 개별적간부들의 지시를 엄격히 구별하며 개별적간부들의 지시에 대하여서는수령님의 교시에 맞는가 맞지 않는가를 따져보고 조금이라도 어긋날때에는 즉시 문제를 세우고 투쟁하여야 하며 개별적간부들의 발언내용을《결론》이요,《지시》요 하면서 조직적으로 전달하거나 집체적으로 토의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9)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교시와 당정책에 대하여 시비중상하거나 반대하는 반당적인 행동에 대하여서는 추호도 융화묵과하지 말고 견결히 투쟁하여야 한다.

10)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혁명사상과 어긋나는 자본주의사상, 봉건유교사상, 수정주의, 교조주의, 사대주의를 비롯한 온갖 반당적, 반혁명적, 사상조류를 반대하며 날카롭게 투쟁하며 수령님의 혁명사상, 주체사상의 순결성을 철저히 고수하여야 한다.




5.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교시 집행에서 무조건성의 원칙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교시를 무조건 집행하는것은 수령님에 대한 충실성의 기본요구이며 혁명투쟁과 건설사업의 승리를 위한 결정적조건이다.

1)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교시를 곧 법으로, 지상의 명령으로 여기고 사소한 리유와 구실도 없이 무한한 헌신성과 희생성을 발휘하여 무조건 철저히 관철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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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9000&num=100789












1904 -- 1910 이승만 '독립정신'



[ ..... 자유를 존중하는 것은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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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세의 李承晩, "첫째, 우리는 세계에 대해 개방해야 한다"


李承晩이 1904년 獄中에서 썼다가 출옥한 뒤 출판했던 '독립정신'을 읽어보면 그는 20代 후반에 이미 정신적으로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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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정신’ 에는 ‘요약과 결론’에 해당하는 ‘後錄’이 있다. 여기서 뽑은 말들을 소개한다. 이 글이 104년 전 29세의 조선 청년에 의하여 쓰여졌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읽어보자.


첫째, 우리는 세계에 대해 개방해야 한다.


1. 우리는 세계와 반드시 교류해야 한다. 2. 通商(통상)은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3. 오늘날 通商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근본이다. 4.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오는 것은 우리를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다. 5. 외국인들을 원수같이 여기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둘째, 새로운 文物을 자신과 집안과 나라를 보전하는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1. 외국인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 2. 경쟁하는 마음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3. 외국인의 압제에 대해선 싸워야 한다. 외국인에게 뭇매를 맞은 한국인이 그 외국인을 죽이고 경찰에 자수한 일은 칭찬할 것이 못 되지만 그 의지는 본받을 만하다. 4. 동양의 옛날 책보다는 새로운 학문에 대한 책들을 공부해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국제법, 통상조약, 우리나라 역사와 지리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 5. 과거의 제도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것조차도 버리고 바꿀 수 있다는 각오를 가지고 사람과 가정과 나라가 모두 새롭게 됨으로써 우리나라가 영국과 미국과 같이 되도록 한마음으로 힘쓰면 일본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6. 물건을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긴급하다. 7. 신학문을, 한글로 번역하여 한문을 모르는 사람도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8. 공부하는 것은 잘 살기 위한 투자이다. 9. 유학을 간 사람은 나라를 위해 시급한 것부터 공부하여야 한다. 귀국할 형편이 못 되더라도 뿌리치고 반드시 귀국하여 어두운 세상에 등불이 되어야 한다.


셋째, 외교를 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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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나라의 주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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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도덕적 의무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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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째, 자유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1. 자유를 자기 목숨처럼 여기며 남에게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2. 다른 사람의 권리 또한 존중해야 한다. 우리 집 종이나 다른 사람들의 하인, 또는 부녀자들과 아이들까지 모두 존중해야 한다. 3. 개화되지 못한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어서 폐단이 있더라도 윗사람들이 어느 정도 손해를 보는 것이 옳다.

3. 부디 깊이 생각하고, 고집부리지 말고, 모든 사람들이 힘껏 일하고 공부하여 성공할 수 있도록 자유의 길을 열어놓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에게 스스로 활력이 생기고, 관습이 빠르게 변하여 나라 전체에도 활력이 생겨서 몇 십 년 후에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를 존중하는 것은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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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orea318.com/client/board/view.asp?sEtpnum=7342&sEtpTp=BA01&cPage=11

"자유를 존중하는 것은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다”
哲人통치자 李承晩이 선물한 자유가 국가경쟁력의 源泉이다.

趙甲濟
2017-03-02 17:18:31
14.32.255.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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