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명옥현 배롱나무
담양 명옥현 배롱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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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09.08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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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제 길을 가는 성리학자에게서 찾아지는 불굴(不屈)

그것을 100일 동안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가 보여준다



배롱나무에는 남녀의 기다림에 관한 전설이 있다. 어린 시절 내가 친구에게 들은 전설에 의하면, 그 기다림은 우여곡절 끝에 여자의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그 자리에서 솟아난 게 배롱나무이다.

‘누가 죽었다. 그래서 꽃으로 피어났다.’는 이런 구도는 꽃에 연관된 전설에서 상투적이다. 꽃은 그냥 피어나는 게 아니라 ‘죽음을 통과한 부활’임을 말하는 성싶다.

전설은 상투적이지만 그 모양새는 심상치 않은, 연륜만으로도 벌써 3백여 년에 이르는 배롱나무를 보러 전남 담양군 무등산 자락의 명옥헌(鳴玉軒)으로 간다. 정자 옆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옥구슬이 굴러가는 소리를 연상시킨다고 하여 명옥헌이라고 이름붙였다고 한다.

명옥헌을 만든 사람은 조선 중기의 인물인 오명중이다. 그는 아버지 오희도가 살던 터에 명옥헌을 짓고 그 아래에다 배롱나무를 심은 후 정원을 조성한다. 정원이라야 간단하다.

네모진 연못과 그 가운데의 작은 섬이 전부이다. 소위 방지원도(方池圓島) 형태이다. 이곳도 이런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는가 하는 아쉬움이 있다. (방지원도는 성리학이 지도이념이던 조선의 정원에서는 너무나 흔히 발견되는 것으로 이 역시나 상투적이다. 자연 경관을 그대로 살렸다는 소쇄원에서도 대봉각 옆에다 방지(方地)를 의미하는 연못을 파 두고 있다.)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3백여 년에 이른 배롱나무들이다. 수십 그루의 배롱나무들이 연못 주위로 서 있다.

목백일홍 또는 그냥 백일홍이라고도 불리는 배롱나무는 중국이 원산지인 나무이지만(중국에서는 紫微花로 부른다) 우리나라에도 옛적부터 심어져 왔다. 부산에는 800년 된 배롱나무가 천연기념물 제168호로 지정돼 있는 걸 보더라도 이 나무가 근래에 중국에서 귀화한 나무는 아니라는 걸 알려준다. 상록수가 아닌데도 겨울에는 추위를 많이 타서 배롱나무는 우리나라 남녘 지방에 많고 그래서 경상남도의 도화(道花)이기도 하다.

배롱나무의 맛은 여름이 제격이다. 붉은 꽃잎이 가지 끝마다 터져나와서 나무를 덮고 있는 모습이 아주 강렬하다. 작열하는 뙤약볕 아래서 오히려 더 붉어서 열정과 신념을 보여주는 듯하다. 예로부터 선비 옆에는 배롱나무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 왜 생겨났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배롱나무 꽃을 들여다보면 명확히 잡히는 모습이 없다. 자잘한 레이스가 모여 있는 듯하다. 한마디로 말해 모습이 흐물흐물하고 여리다. 그런데도 조금 떨어진 데서 보면 꽃이 강렬하게 느껴지는 것은 배롱나무의 가지 끝에서 꽃이 일시에 피어나기 때문이다. 작은 것이 모여 큰 것을 이루는 한 전형을 보여준다.

이 꽃은 개화시기가 오래 간다. 배롱나무를 백일홍(百日紅)이라고 하는 것은 ‘백일 동안이나 붉다’는 뜻인데 실제로 배롱나무는 석 달 가량을 피어 있다. 꽃 한 송이가 백일을 가는 게 아니고 수십 개의 꽃봉오리가 차례대로 피어나기 때문이다. 뙤약볕과 늦여름의 태풍을 이기면서 피고 또 피어나는 배롱나무 꽃의 모습에서 불굴(不屈)을 느낀다.

우리는 흔히 겨울의 소나무에 기상이 넘친다고 하고 이른봄에 피는 매화에 군자의 기상이 서려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주어진 외부 환경에 저항하는 모습으로서의 기상이다. 그것을 두고서 우리는 ‘불굴의 기상’이라고 부연설명을 하지만 실제로는 거부(拒否)에 가깝다. 이 때의 거부는 주어진 환경을 바꾸려는 강력한 의지라기보다는 외부 환경을 결코 인정할 수 없다는 분명한 자기 견해이다.

배롱나무 꽃이 전하는 불굴은, 주어진 환경을 받아들이면서 그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현실 속에서 이루어내는 최선이다. ‘비분강개하기는 쉬워도 평생을 두고 제 길을 가는 군자가 되기는 어렵다.’는 성리학의 그 최고 경지를 배롱나무의 꽃들이 표상해 준 다.

나는 조선조 선비의 모습을 되새겨보고, 군자의 마음가짐을 미루어 짐작해보려고 명옥헌 배롱나무를 찾는다. 뙤약볕이 쏟아지는 이 여름에 단심(丹心)처럼 붉은 그 꽃을 보려고.



정법종 기자 power@epower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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