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에서 만나는 전기(電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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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09.24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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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키 워드(Key Word)가 영화소재인 전기를 통해 관객에게 제시

전기는 다양한 이미지로 사랑, 화해, 역사 등 삶의 모두를 형상화


20세기에 시작된 영화는 100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전세계에서 가장 대중적인 예술로 자리잡았다. 이런 현상은 21세기에 이른 지금에도 전혀 변하지 않고 있다.

대중오락이나 대중예술로서의 영화는 그 의미가 다양하다. 그 중의 하나는 영화의 장면이나 대사가 사회 현상의 읽은 키워드(key word)로서 역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영화가 사회 현상을 응축하는 장면이나 대사를 포괄하고 있다는, 그러하기 위해 여러 시도를 기울여 왔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런 차원에서 영화가 전기 혹은 전기산업을 어떤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일은 흥미로운 작업이다.

영화를 알아보려면 시대별 작품 경향 그리고 감독들의 성향을 찾아가야 하지만 여기서는 제외한다. 영화 역사, 영화 감독의 계보 살펴보기는 영화 전문가에 맡겨 두기로 한다.

여기에서는 영화의 소재로 쓰인 전기를 다루려고 한다. 전기는 물론 가시적인 물질이 아니라서 이미지화되지는 않기에 (물론 SF 영화에서는 전기의 흐름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보여주며 이런 점은 매트릭스 1, 2가 좋은 예이지만) 가시적인 전기용품이 바로 영화 속의 전기에 해당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가시적인 전기용품이야 영화 한 편에서도 숱하게 등장하는 바인데 여기에서는 앞서 말한 대로 시대를 읽는 키워드(key word)로 작용하는 것들에 한정했다.

이제 영화 속으로 들어가보자.

전기 스위치가 보여주는 기계화된 현대… 모던 타임즈

찰리 채플린은 영화를 통해서 사회를 이야기한 배우이자 제작자이다. 시대의 키워드가 그의 영화에서 쉽게 찾아지는 것은 이런 이유이다.

찰리 채플린 주연의 <모던 타임즈>는 말 그대로 ‘현대(modern times)’를 소재로 한 영화다. 제목에서부터 시대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의 현대적 공간이 등장하고 주인공은 그곳에서 방황한다.

<모던 타임즈>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컨베이어 벨트에 주인공 남자가 끼어 있는 상황이다. 주인공 남자는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움직이면서 기계에 너트를 조인다.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소재가 등장한다. 컨베이어 벨트는 바로 전기 스위치에 의해서 작동되고 멈춘다는 사실이다. 전기 스위치가 컨베이어 벨트, 다시 말해 모던 타임즈의 작동을 통제한다는 점이다.

브레이버만의 <모던 타임즈> 분석에 의하면 컨베이어 벨트 장면은 노동과정의 단계와 양식이 통제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스위치로 조작되는 컨베이어 벨트는 노동자 개개인의 작업을 관리자가 완벽하게 통제하는 것이며 이는 자본가가 원하는 상황이다.

전기 스위치에 의해 움직이는 컨베이어 벨트는 테일러주의(포드주의)를 상징하는데 바로 이 테일러주의(포드주의)가 하나의 권력이라는 사실이다. 노동자의 행위(나아가 그 주체인 몸)를 지배하는 권력. 나중에 미셜 푸코가 ‘생체권력’이라고 정의한 그 권력.

<모던 타임즈>에서 우리는 스위치를 만나게 된다. 사회 과학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전기 스위치가 우리의 삶을 통제하고 있다는 점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일이다. 스위치를 켜야 전등에 불이 들어오고 컴퓨터가 부팅되며 텔레비전의 뉴스가 흘러나오는 것 아닌가?

전기 스위치야말로 <모던 타임즈>인 것이다.

사랑을 위한 자가 발전(自家發電)…러브레터

일본 영화 <러브레터>의 첫 장면은 인상적이다. 한 여자가 언덕을 내려가 눈이 쌓인 마을로 들어가는 모습인데 언덕을 다 내려가기까지의 전 과정이 롱테이크로 이어진다. 이 대목은 주인공 여자가 남자의 죽음(그는 눈이 덮인 산에서 죽었다)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그곳은 언덕 아래의 마을이다)을 찾는 영화 전반을 상징하는 듯하다. 소설 문법으로 말하자면 전체 스토리에 관한 복선인 셈이다.

<러브레터>는 와따나베 히로코가 2년전 죽은 옛 연인 후지이 이츠키에게 편지를 쓰면서 시작한다. 후지이가 중학시절에 살았던 `오따루`로 편지가 간다. 물론 돌아올 거라는 예상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답장이 온다. 후지이 이츠키로부터의 답장.

와따나베 히로꼬는 그를 찾아간다. 그녀에게 답장을 보낸 사람은 죽은 연인이 아니라 그와 동명이인이며 시립도서관에서 일하고 있는 여인이었다. 여자 후지이는 남자 후지이의 중학교 시절 급우였다. 그리고 둘은 서로 마음을 나눈 사이이기도 했다.

이렇게 이어지는 <러브레터>는 우연 속에 교차하는 사랑 이야기다. 예기치 못한 우연과 추억 그리고 사랑의 아이러니가 등장한다.

스토리 전개가 너무나 극적이고 우연이 많아서 작위적인 냄새가 많이 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대로 사랑의 아픔은 전달돼 온다. 특히나 이 영화가 10대 감성파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런 작위성을 이해할 만하다.

<러브레터>에서 전기와 관련된 유명한 장면은 편지를 읽기 위해 자전거 페달을 밝아서 자전거의 전조등을 켜는 대목이다. 이 대목에서 느껴지는 것은 전기 발전의 원리가 아니라 사랑은 결국 자가 발전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삶도 자가발전에 의해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자건거 전조등을 밝혀 편지를 읽는 그 대목이야말로 <러브레터>의 주제를 형상화한 듯하다.

인간 갈등을 상징하는 도시의 고압선…흑인 오르페우스

많은 사람들이 카니발의 아침(Manha De Carnaval)이라는 음악을 기억한다. 쓸쓸한 가락의 허밍으로 시작되는 첫부분이 가을에 들으면 감성을 자극한다.

우리나라 영화 <정사>(이미숙, 이정재 주연)에서 배경 음악으로 쓰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이 영화가 프랑스 영화감독 마르셀 까뮈(Marcel Camus)의 영화 흑인 오르페우스(Black Orpheus)의 주제곡이라는 걸 아는 이는 드물다.

<흑인 오르페우스>는 우리나라에 소개된 영화는 아니지만 영화 메니아들 사이에서는 알려진 영화이다. 어떤 이들은 카니발의 아침이란 음악을 접하고는 그게 영화 주제가였다는 것을 알고서 영화 <흑인 오르페우스>를 기억하게 된다.

오르페우스는 잘 알려진 고대 그리스의 비극적인 이야기다. 오르페우스는 죽은 애인 에우리디케를 저승에서 데려오려고 지하 세계로 간다. 거기에서 음악으로 지하세계의 왕을 감동시키고 에우리디케를 데려가라는 허락을 얻는다.

지하에서 나갈 때까지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 붙는데 오르페우스는 지하세계를 다 나오기 전에 에우리디케를 보려고 돌아본다. 그 자리에서 그는 죽고 마는 것이다.

마지막의 이 대목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사실은, 사랑이란 ‘남이 정해 준 규칙’을 따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늘 여기에서 벗어나 저곳을 향한다. 그것이 사랑의 아름다움이자 비극이다.

<흑인 오르페우스>는 그리스 비극을 서사 구조로 채택하지만 무대와 등장 인물들이 다르다. 무대는 리오의 카니발이며 여기 등장하는 이들은 브라질의 작가 비니시우스 데모라에스가 창조해 낸 남녀이다.

이 영화에서 마르셀 까뮈 감독은 남미의 풍토와 그곳 특유의 삼바 리듬을 적절히 활용하여 검은 피부를 가진 남녀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 여주인공은 자신을 겁탈하려는 사나이를 피해 전차 위로 올라간다. 거기서 도망치려고 고압선에 매달린다. 이런 상황을 전혀 모르는 모르는 남자 주인공은 자신의 애인인 여주인공의 외침을 듣고 전등을 밝히려고 전기 스위치를 올린다. 이 순간 고압선에 매달려 있던 여주인공이 감전돼 죽게 된다.

<흑인 오르페우스>에서 고압선은 도시에서 살아가는 현대 젊은이들의 애증을 상징한다. 여주인공이 도망치려고 이용한 도구가 고압선인 점에서 보여주듯이 남녀의 애증은 고단한 현실의 도피처이지만, 그 고압선에 의해 여주인공이 죽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남녀의 애증은 죽음을 불러오기도 한다.

이처럼 도시의 고압선은 사랑과 증오,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상징한다. 그것은 주제가 ‘카니발의 아침’이 제목으로는 기쁨을 말하면서 가락으로는 슬픔을 전달하는 것처럼 이율배반적이다.
우리의 삶이 이율배반적이지만.

인간 상호간의 연결을 상징하는 송전선로…이웃집 토토로

일본 애니메이션 <이웃집 토토로>는 우리 나라에서는 크게 환영받지 못한 듯하다.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일본의 설화가 우리에게는 낯익지 않는데다가 디즈니랜드 풍의 상당히 요란한 애니메이션에 길들여진 관객들에게 잔잔하게 흐르는 ‘이웃집 토토로’의 화면과 음악이 선뜻 받아들여지 않았으리라.

일본에서 <이웃집 토토로>는 많은 상을 받았다. 제43회 마이니치콩쿨 일본애니메이션대상, 제39회 예술선장 문부대신상, 제12회 아마미치 후미코 애니메이션상, 제12회 야마미치 후미코 애니메이션상 등등.

<이웃집 토토로>는 일본에서 개봉되고 13년이 지난 후에야 우리 나라에서 개봉됐다. 예전에는 일본 문화 수입금지 조치가 있어서 일본 애니메이션이 수입되지 않은 게 한 이유이겠지만, 수입 허가 이후에도 이 작품이 들여오지 않았다는 것은 이 애니메이션이 우리 정서에 맞지 않으리라는 수입업자의 판단이 수입 유보로 이어졌던 게 아닌가 싶다.

<이웃집 토토로>는 일본 신화의 정령인 토토로가 등장한다. 애니메이션은 동심에 의한 환상을 보여준다. 사츠키가 우산을 받쳐 들고 있을 때 그 옆에 살며시 다가와 서있는 토토로, 두 주인공이 고양이 버스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장면등이 관객을 환상으로 데려간다.

애니메이션은 휴머니즘이라는 낯익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두 아이와 토토로가 만들어 가는 이야기에는 가족애가 물씬 묻어난다. 그리고 애니메이션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자극한다. 일본의 문화와 풍물에 낯선 우리가 보아도 어린 시절의 추억이 기억되는데 일본인들은 오죽했으라 싶다.

추억을 만들어내는 1960년대 일본 농촌. 여기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송전선로이다. 일본 농촌의 모습이 나오는 화면에서 우리나라의 송전탑과 모양이 똑같은 (우리나라 송전탑의 모델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송전탑이 서 있고 그 사이에는 고압 선로가 걸려 있다.

애니메이션 속에서 송전선로는 인간 상호간의 연결을 의미한다. <이웃집 토토로>에서는 모든 것이 연결된다. 아이들은 서로가, 아이와 부모들이, 아이와 정령 토토로가 다 이어진다. 이런 연결의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송전선로이다.

전등 불빛 없는 어둠이, 밝음을 잠식해 나간다…살인의 추억

금년 상반기 국내에서 최대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는 <살인의 추억>이다. 이 영화는 실제로 1986년 경기도 화성에서 시작된 연쇄 살인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물론 사건 그대로는 아니고 영화에 맞게 각색되었음은 물론이다.

연쇄 살인사건이 일어나던 당시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잡히지 않았다.) 범인을 잡기 위한 여러 방법이 시도되었다. 이런 점은 영화에서도 재현된다.

영화는 많은 부분에서 어둡다. 이것은 살인사건이 밤에 일어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화에서는 어둠을 통해 우리의 어두운 과거를 은근히 드러낸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났던 1986에서 1991까지의 우리 나라는 온갖 사건이 난무한 시대였다는 점을 전제한 뒤 “화성사건의 연대기를 보면 한국 사회의 현대사가 보일 정도이다.”라고 영화 제작사 측은 밝혔던 것이다.

당시는 5공화국 붕괴 직전이었다. 공권력은 정권유지에 동원돼 있었다. 공권력은 정권을 위해 권인숙을 성고문하고(1986년), 박종철을 고문해 죽이고 그것을 은폐 조작했으며(1987년), 이런 치부를 숨기고자 아시안 게임과 서울 올림픽을 내세웠다.

국민을 세뇌하기 위해 그토록 반복됐던 구호. ‘체육행사만 잘 치르면 나라는 위대해진다.’

이런 사회 상황이 배경으로 깔리고 거기에서 연쇄 살인은 일어난다. 살인은 비오는 밤에 이뤄진다. 전등불빛이 없는 어두운 시간.
어둠 속에서 일어난 살인은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한낮은 지난 밤의 살인에 의해 우울하게 된다. 밤의 어둠, 전기 등불이 없는 그 어둠이 낮의 밝음까지 잠식해 나간다. 권력이 제멋대로 남용한 공권력에 의해 국민들의 마음이 고통으로 물들어 가듯이.

살인의 시간에는 전등 불빛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밤도 전등 불을 켜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전등 불빛의 추억>이다.



정법종 기자 power@epower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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