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 보길도 세연정
이곳에서 나는 오래 머무른다
완도 보길도 세연정
이곳에서 나는 오래 머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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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10.13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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냇물에 잠겨 있는 둥글고 작은 바위들
윤선도가 도달한 마음이 깃들어 있다

겨울에 우리나라의 바위는 얼어서 동파(冬破)하게 된다. 설악산이나 북한산에서 우리는 바위에 난 틈을 흔히 발견하게 되는데 동파된 흔적이다.

바위를 온전하게 남겨두지 않는 추위. 그 매서운 추위에 바위는 조각이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각이 난 채로 죽어지내는 것은 아니다. 바위 조각은 가장자리의 날이 선 너설을 그대로 두지 않고 물과 바람을 불러들여 갈아 나간다. 수십 년을 넘어서 수백년이 지나면 너설은 사라지고 바위 조각은 둥그스름한 모습으로 다시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다. 바위 조각이 아닌 새로운 바위가 돼 가는 것이다.

설악산과 북한산에 볼 수 있는 그 매끄러운 바위 면은 수천, 수만 년의 세월을 바위가 견디어 내었음을 말해 준다. 묵묵히 보낸 그 세월을 두고 유치환은 ‘바위’라는 시에서 ‘천년의 함묵(含默)’이라고 말했다.

보길도 세연정에 들어서면 눈에 드는 것이 바위들이다. 남해의 바닷바람에다 이마를 내 주고 격자봉에서 흘러내린 물에 발목을 씻고 있는 십 수 개의 바위들.
바위들은 하나 같이 위쪽이 반반하다. 먼길을 거쳐 온 나그네가 잠시 허리쉼을 하며 앉아 있기에는 딱 적격이다.

땀을 들이고 나서 바위를 손으로 쓸어 본다. 매끄럽다.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바람과 물로 너설을 없애고 몸을 가다듬었을까?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만 이런 바위처럼 원만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

냇물은 맑게 흐르고 바위는 유유히 앉아 있다. 그 자태에 속기가 없고 여유가 있다. 나는 바위 위에 앉아 물과 하늘을 망연히 바라본다. 예전에 윤선도(尹善道)가 그러하였으리라 믿으며.

윤선도가 처음부터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세상에서 자신의 뜻을 펴고자 했던 사람이다. 그의 본관은 해남(海南)이고 호는 고산(孤山)이다. 광해군 4년에 진사가 됐고 성균관 유생으로 이이첨의 횡포를 상소했다가 함경도 경원에 유배됐다. 인조반정으로 복직됐으나 낙향했다. 다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나가서 초시(初試)에 장원을 했고 이후 봉림대군의 사부를 거쳐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을 지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 하여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효종 3년에 복직됐으나 남인의 우두머리로서 서인의 세력을 꺾으려다가 실패해 유배당했다.

그는 말년에 세상을 등지고자 배를 타고 해남에서 제주도로 떠났다. 가는 길에 잠시 보길도에 멈추어 부용동에 들렀다. 그는 부용동의 산수가 심상치 않은 걸 보고 격자봉 정상에 올라가 사방을 살펴보고 나서 “이곳은 하늘이 나를 위해 남겨둔 곳이다.”라고 외치며 몹시 기뻐하였다.

그는 부용동 아래쪽 포구가 보이는 곳에 세연정을 지어 물과 바위를 벗했으며 격자봉 아래 산록에다는 낙서제(樂書齊)를 지어서 책을 읽었다. (낙서제는 터만 남아 있다.)
그가 부용동에 머물 적에 지은 어부사시사는 사계절에 각각 10수씩 모두 40수로 돼 있다. 고려 때부터 전하던 ‘어부가(漁父歌)’를 윤선도가 시조의 형식에다 여음을 넣어 완성한 것이다. 어부사시사는 우리말을 능란하게 구사하여 자연에 합치한 어부의 생활을 잘 묘사한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세연정의 바위에서 윤선도가 떠올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격한 당쟁에 의해 그가 계속 다녀야만 했던 유배 생활의 아픔? 벼슬에 올라 백성을 위해 정치를 하던 득의(得意)의 시절? 득의와 실의가 번갈아 이어진 삶의 허망함은 아니었을까?

나는 다시 바위를 쓰다듬는다. 바위가 내 맘에 든 것은 매끄럽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의 크기가 걸터앉아 있기에 딱 좋다.

동파 되어 새로 태어난 바위들. 저 산 위에 버티고 있는 거대한 바위덩이가 아니라 사람 사는 산 아래에서 둥근 모습으로 모여 있는 작은 바위들.
이곳에 앉아 있는 동안 나는 마음을 연다. 물과 바람에게, 산과 하늘에게.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윤선도가 삶의 마지막에 마음을 연 곳이 여기 아닌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나는 세연정 정자로 올라간다. 거기에 앉아서 바위를 다시 보기 위해서이다.



정법종 기자 power@epower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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