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한국, 의료문화의 차이
미국과 한국, 의료문화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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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4.09.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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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에서는 자녀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부모와 같이 살게 되면 자녀에게도 생활비를 내게 한다고 한다. 또 미국에서는 자녀에게 용돈을 줄 때 반드시 작은 일을 하고 그 대가로 용돈을 주는 것이 중류층에서 흔히 보는 일이라 한다. 그래서 많은 식자들이 이러한 미국의 용돈 지급 형태가 바람직한 것으로 말하기도 했다.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유럽 문명권은 인간관계를 계약으로 설정하는 문명권이다. 모세의 10계명에서 보듯이 신과 인간과의 관계도 계약 관계이다. 흔히 하는 말로 give and take의 관계인 것이다. 받지 않았으면 줄 필요도 없는 관계가 계약이다. 중세 유럽의 봉건제도에서 보듯이 왕과 신하의 관계에서도 충성도 왕이 무엇인가 신하에게 주어야만 신하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유럽의 계약 문화다.

이에 반해 동아시아 문명권은 계약을 넘어선 절대적인 윤리를 중심으로 하는 문명이다. 왕이나 부모가 아무리 못났어도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하는 것이 동아시아 유교 문명의 윤리다. 이러한 현상이 모두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유럽문명과 동아시아, 나아가 한국의 문명·문화의 차이를 바로 인식하는 것도 의료제도의 수립에도 중요하다.

동아시아에서는 인륜, 천륜이라는 말에서 보여지듯 부모-자녀간의 관계는 계약을 넘어서서 서로가 절대적으로 보호하고 부양해야 할 관계인 것이다.

자녀에게 어떤 일을 한 대가로 용돈을 주는 것과 그냥 주는 것, 사랑의 표시로 주는 것의 차이는 명백하다.

물론 어떤 것도 지나치면 좋지 않지만 유럽이나 미국식이라고 해서 무조건 찬양하고 따라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일을 해야만 용돈을 주는 부모에게 계약 이상의 깊은 사랑과 정을 느끼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부모가 암에 걸렸다고 의사가 아들에게 전화를 했더니, 아들이 부모의 병세에 대한 걱정보다 제일 먼저 물어 본 것이 자기에게 암에 걸릴 가능성이었기에 미국 사회에 회의를 느꼈다는 의사 선배도 있었다.

그렇다면 의료제도를 둘러싼 문화의 차이를 또 살펴보자. 미국은 보호자가 병원에서 잠을 자는 일이 없다. 환자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병원에서 제공한다. 쉽게 말해 한국에서 보호자나 간병인이 해야 할 일 모두, 간병에 필요한 모든 것을 병원에서 제공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사회 여건이 변해 간병을 할 가족은 거의 없어지고 병원의 인력문제로 미국과 같이 모든 간병 서비스를 병원에서 제공하지 못해 결국 간병인이라는 직업이 생기게 됐다. 이는 앞으로 의료소비자 입장에서 문제를 제기할 소지가 될 것이다.

또 미국은 직업에 대한 특성과 전문성을 존중하는 반면 한국은 고급 인력만 요구하는 현상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특별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한 미국에서는 응급구조사의 응급조치에 대해 존중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현재 수 많은 응급구조사가 있으며 환자의 후송을 담당하고 있으나, 그야말로 후송에만 그치고 응급구조사의 응급치료는 거의 없다시피 하고 있다. 환자나 보호자가 응급구조사의 응급처치를 신뢰하지 않고 의사의 치료만을 치료로 인식하는 문화적 차이 때문이다.

한국도 많은 부분 미국을 닮아가고 있으면서 이러한 문화적 차이로 인한 문제가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응급실에서 흔히 보는 것이지만 노인 환자들이 자녀들이 돌보지 않아 홀로 응급실에서 입원도 하지 못하고 퇴원도 할 수 없어 오도가도 못하게 되는 일이 종종 발생하고 있다.

이는 전통적인 한국의 가족 간의 유대가 사회의 변화로 인해 문화 지체를 겪기에 일어나는 일일 것이다. 필자는 이제 격변기의 한국에서 의료 문화의 차이를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국가와 사회만이 아니라, 개개인도 앞으로의 노년기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대책을 세워야 할 때임을 응급실에서 절감하게 된다.

김승열 / 강릉 동인병원 응급의학과장,
영동 응급의료 정보센터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