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이 병을 만든다
병원이 병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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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4.09.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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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이 병을 만든다'는 말은 1970년대에 유명한 남미의 신학자인 이반 일리히라는 사람이 쓴 책의 한글 번역판의 책 제목이다.

의료계에서는 대표적인 비주류적인 주장을 한 사람으로 이 사람은 극단적으로 병원, 의사, 전문적인 의료인은 전혀 불필요하고, 병의원이나 의사들이 오히려 병을 만들고 사람들의 건강을 더 해친다는 주장을 했다.

얼핏보면 황당한 주장이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그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부분도 적지 않다.

의사의 오진이나 잘못된 치료로 병을 만들거나 악화시키는 의인성(iatrogenic) 질병은 말할 것도 없고, 또 다른 예로는 최근 의료계 일각의 주장이기도 하지만, 앨러지는 빈곤 계층보다 고소득 층에서 더 많은데 그 이유는 빈곤층이 어릴 때 치료를 적게 받아 앨러지에 대한 저항성이 생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의료는 다른 산업 분야와 달리 수요가 공급을 창출하기보다는 공급이 수요을 창출하는 면도 있다고 했다. 즉 의사는 스스로 치료 분야를 확대하고 수익을 도모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예전에는 병이 아니거나 치료의 대상이 아닌 성형수술이나 불임 등의 면모를 보자면 '병원이 병을 만든다'는 말도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을 인간의 질병 모두에 적용하는 이반 일리히의 주장은 극단적이다.
수많은 빈곤 국가에서 탈수와 설사로 죽어가는 어린이를 살린 유아용 경구 수액을 개발한 것도 의학이고, 수도 없이 많은 어린이를 죽이고 부모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천연두를 박멸하고, 소아마비를 비롯한 수많은 치명적인 전염병의 예방을 가능하게 한 것도 의학의 성과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한국에서 한두명의 자녀만 낳는 단산이 가능한 것도, 대부분의 영아가 사망하였던 수십년 전과 달리 태어나는 대부분의 아이가 생존이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만 보아도 이반 일리히의 주장은 극단적임을 알 수 있다.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반 일리히의 주장의 일부분이 옳다는 점이 아니라, 이러한 주장을 한 사상이나 철학의 배경에 있다.

이반 일리히가 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은 오늘날 현대 의학이 도입된 국가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의 몸이나 질병에 대해 자율성을 잃고 자기 몸을 의사에게만 맡기게 된 의존관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도 자주 경험하는 것이지만 전혀 치료가 필요 없는 사소한 외상, 예를 들어 얼굴이 조금 긁혀 흉터도 남지 않고, 아무런 치료도 필요 없는 찰과상조차 응급실에 진료를 받으러 오는 광경은 의사의 진료를 받기 전에는 안심을 할 수가 없어 일어나는 현상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이 자기 몸과 질병 등에 대해 어떠한 자율권, 통제권도 없이 의사에게 온전히 몸을 맡기게 되는 것, 적어도 질병에 대해서는 의료나 의사에 종속되어 버린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현대 의학이 발달하면서 제도적, 심리적으로 대부분의 사람을 의료의 노예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더욱더 심각한 것은 이러한 제도 속에서 살아가면서 이러한 현상이 너무나 당연하기에 자기가 노예가 되어 버린 것도 모른다는 점이다.

또 한편으로는 현대의학의 너무나 방대하고 깊은 지식에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또 다른 사이비나 돌팔이 의학에 몸을 맡기게 되기도 한다. 철학 용어로 말하면 이중의 소외가 발생한 셈이다. 현대의학에 완전히 종속돼 소외된 사람들이 다시금 소외돼 사이비나 돌팔이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필자는 의료인이 아닌 사람도 이러한 이중의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의학의 기본이나 기초를 알아야 하고 학교 교육에서도 최소한의 의학 지식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 김승열 / 강릉동인병원 응급의학과 과장, 영동응급의료정보센터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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