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이달의 기능한국인’ 와이티에스 황순철 이사
‘4월, 이달의 기능한국인’ 와이티에스 황순철 이사
  • 김규훈 기자
  • kghzang@energydaily.co.kr
  • 승인 2014.04.22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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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회 기능올림픽 기계제도분야 금메달 수상 후 30년간 기계설계 한 길
‘평판 디스플레이’ 세계 최초 기술 보유 등 LCD 장비 국제경쟁력 확보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은 4월 ‘이달의 기능한국인’으로 (주)와이티에스 황순철(53세) 이사를 선정했다. ‘이달의 기능한국인’여든 여섯 번째 수상자 황순철 이사. 그는 1981년 제 26회 기능올림픽 기계제도분야 금상 수상 후 지금까지 기계 설계 한 길만을 걸어온 기계 설계 전문가이다. 황 이사는 금형 설계에서 시작해 프레스 설계를 거쳐 제품 설계 전문가로 끊임없는 자기발전의 기회를 만들어왔고, 지금은 평판디스플레이 장비 분야에서 국내 최고로 인정받고 있다. Laser Beam Multi-Titling장비의 표준화로 원가절감과 해외 수출의 길을 넓혔고, 세계 최초 FPR (3D) Panel Laminator 장비 개발에 참여해 성공시킴으로써 우리나라 평판디스플레이장비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지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킨 장본인이다.


 
경상남도 고성군 교사리가 고향인 황순철 이사는 ‘불우하고 가난했던 시절’로 초등학교 시절을 기억한다.

어려운 가정환경 때문에 경남송계초등학교를 시작으로, 부산가야초등학교, 서울 답십리 초등학교, 그리고 인천 석남초등학교까지 6년 동안 네 차례나 전학을 다니면서 기억에 남는 친구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중학교를 진학했지만 어려운 환경은 마찬가지였다. 중3이 되었지만 고등학교 진학의 길은 멀기만 했다.

학교에서는 고등학교를 진학할 형편이 못되는 학생들에게는 오전수업만 하고 하교를 시켜줬는데, 황 이사는 이때를 ‘할 일도 갈 곳도 없어 막막했던 시절’로 기억한다.

“그때 저는 유재두 선수의 권투에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무얼 할까 생각 하다가 프로권투 선수가 돼야겠다 생각했어요, 배고프고 배운 것 없는 저에게 권투세계챔피언은 처음으로 제가 가질 수 있었던 꿈이었습니다.”

프로권투선수가 되기 위해 인천 제물포역 앞의 권투도장을 찾아갔지만 입회비 3000원과 월 훈련비 3000원을 낼 수 없어 포기해야했다. 당시 버스요금이 15원 하던 시절이었으니 3000원이라는 돈은 중학생 황순철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돈이었다.

꿈을 키워보지도 못한 채 좌절한 그에게 찾아온 황금 같은 기회는 ‘인천기계공고’의 설립이었다.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주어진 환경에서는 언제나 최선을 다했던 터라 항상 상위권을 유지했던 그에게 담임선생님은 장학금으로 고등학교진학이 가능한 인천기계공고를 추천해 주셨다.

고등학교 진학을 할 수 있는데다, 기술을 익혀 사회에 나갈 수 있다는 기쁨과 함께 인천 기계공고 1기로 입학한 그는 누구보다 빨리 기술을 익혀 사회에서 자리를 잡고 싶었다고 한다.

“기술을 빨리 익히고 싶다”며 담임선생님을 찾아갔고, 담임선생님은 ‘기능대회’의 길을 알려주셨고, 그때부터 기계설계분야 세계대회를 목표로 기능대회를 준비했다. 

기능대회를 준비하는 여느 학생들처럼 그 역시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훈련에 매진했고, 지방대회에서 2등을 했지만 전국대회에서는 입상을 하지 못했다.

다시 한 번 꿈을 잃었다 생각한 그에게 찾아온 또 한 번의 기회는 첫 번째 직장인 ㈜금성통신으로의 입사제안이었다.

“금성통신은 당시 우리나라에서 기계제도 분야로는 최고수준으로 꼽히는 곳이었어요. 그런 금성통신에서 그곳에 입사해서 다시 한 번 기능대회에 도전해 보지 않겠느냐며 입사제안을 해 주었으니 제게는 너무나 큰 기회였지요.”

 
황 이사는 이렇게 금성통신 소속으로 지방대회를 거쳐 전국대회에 출전했고 아깝게 2등으로 입상했다.

그런데, 1등으로 입상한 선수가 나이제한에 걸려 세계대회 출전을 포기하게 됐고, 세계대회 입상은 한 걸음 더 가까워왔다. 하지만 기회는 쉽게 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까지 매년 열리는 세계대회가 2 년마다로 변경되면서 다음해 전국대회 1위 입상자와 3회의 선수평가전을 거치고 나서야 황 이사는 세계대회로 가는 티켓을 거머쥘 수 있었고, 당당히 금메달을 수상하면서 그간의 노력을 인정받았다.

“돌아보면 좌절의 그 순간에 기회는 같이 왔던 것 같습니다. 그 순간에 포기하고 흔들렸다면 그 기회를 잡을 수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세계대회에 입상하겠다는 꿈을 놓지 않았고, 그 꿈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씩 그 꿈에 가까이 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대회 수상 후 돌아온 금성통신에서 그는 금형설계과에 배치됐다. 당시 금성통신은 독일의 지멘스와 합자회사로 금형분야에서는 최고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고, 황 이사는 이곳에서 금형설계의 기초부터최고수준의 기술을 모두 섭렵할 수 있었다.

“현장에서 기술을 익힐수록 허전해 지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세계대회에서 금메달을 따겠다는 꿈을 이루고 난 이후로 새로운 목표를 찾지 못한 것이죠. 또 현장에서 새로운 기술을 익힐 때마다 전문 지식에 대한 갈증 또한 커졌습니다.”

현장에서 새로운 기술을 배울 때마다 조금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은 ‘대학진학’의 목표가 되었고, 황 이사는 회사업무를 마치고 학원에서 대학입시를 준비했다.

하지만 대학의 문은 쉽지 않았다. 기능대회를 위해 고등학교시절을 모두 보낸 까닭에 영어 수학의 기본기가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세 번의 좌절을 딛고 중앙대학교 기계공학과로 진학을 했다.

대학에 진학해서도 쉽지는 않았다. 전공과목은 현장경험 덕분에 쉽게 공부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교양과목이었다.

“일단 공부를 시작했으니,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회사에서 많은 지원을 해 주셨지만, 회사와 공부를 병행하기보다는 원 없이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금성통신을 퇴사하고, 학업에 매진했습니다.”

대학 4년 동안 한 번도 수업에 빠진 적이 없다는 황 이사는 대학졸업 후 린나이코리아에 입사, 프레스 금형설계를 담당하면서 프레스 금형분야에 대한 전문기술을 익혔다.

“설계를 하는 일이 적성에 참 잘 맞았던 것 같습니다. 국제대회 꿈도 이루었고, 대학공부의 꿈도 이루고 나니 내 힘으로 설계사무소를 운영하고 싶다는 꿈이 생기더군요.”

1991년, 황 이사는 중앙설계사무소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설계사무소를 시작했다. 금성통신에서 사출금형설계와 지그설계를 담당했고, 린나이코리아에서 프레스금형 설계를 담당하면서 금형설계용역에는 자신이 있었다.

금형설계는 제품도를 받아 요구하는 제품이 대량생산 될 수 있는 금형(tool)을 설계하는 일인데, 설계사무소에서 금형설계용역을 수주해보니 제품 도면자체에 하자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
 
설계의 경우, 제품 도면이 완벽하지 않으면 금형설계를 정확하게 하더라도 불량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을 수 밖에 없었다.

황 이사는 현장에서 익힌 금형과 가공법을 가반으로 직접 제품설계에 뛰어들었고, 그 첫 작품이 지금도 볼 수 있는 지하철 역 안의 사각형 시계들이다.

제품설계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으면서 수주도 늘어났다. 만능제도기로 직접 제도를 하던 시스템이 CAD도면으로 또 3D도면으로 발전했고 황 이사는 그러한 흐름의 선두에 있었다.

하지만 2005년, 황 이사는 그의 꿈이었던 설계사무소를 정리하고 지금의 (주)와이티에스로 자리를 옮긴다.

“금성통신 입사동기였던 ㈜와이티에스 남성국 대표의 제안이었습니다. ㈜와이티에스는 LCD제조 장비를 만드는 회사인데, 부품의 수가 워낙 많아 제품의 불량을 줄이기 위해 장비설계에 3D 설계를 접목하고자 했던 거지요.”

㈜와이티에스는 LCD장비중 세정기, 타이틀러, 노광기, 드럼폴부착기, FPR부착기 등 다양한 장비에 세계적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

2014년 현재 해외매출이 70%정도 차지하는 글로벌 회사로 성장했는데, 여기에 황 이사의 설계기술이 한몫을 했다.

와이티에스에서 그는 3D로 레이저리페어기를 처음 설계했다. 노광램프하우스를 3D로 설계하면서 최소의 사이즈로 설계한 덕분에 지금도 사용하고 있으며, 레이저 광학시스템의 배치를 3D로 하면서 지금까지도 와이티에스의 표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세계 최초 FPR(3D) Panel Laminator 장비 개발에 참여해 지식경제부장관상을 받기도 했다. LCD장비에 그의 설계기술이 접목되면서 세계적인 제품이 만들어 진 것이다.

“기술에서 1등을 하겠다는 것이 경영진의 의지입니다. 국내뿐 아니라 글로벌 시장에서 무한경쟁을 해 나가는 힘을 기술력 외에는 없으니까요.”

 
㈜와이티에스는 올해 창립 23주년을 맞았다. 총100여명의 구성원들이 세계적인 기술력을 갖추기 위해 끊임없이 준비하고 연구에 투자하고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황 이사가 있다.

황 이사는 어렵고 힘들었지만 꿈이 있어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꿈이 그에게는 기술이었고, 그 기술이 미래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그를 성장시킨 꿈은 그는 다른 이들과 함께 다시 나누고 있다.

“산업현장교수로 대구와 강원의 특성화고를 찾아가 강의를 합니다. 아이들에게 기술의 의미를 심어주고 그 아이들이 만들어갈 미래의 꿈을 함께 찾아주는 일은 제게 그 무엇보다 의미 있는 일입니다.”

산업현장 교수 활동 이 전에도 그는 기술로 꿈을 전하는 전도사로 이름나 있다. 1998년, IMF로 인한 실직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중소기업진흥공단의 사출금형설계과정이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 제품설계과 정을 진행하고 있으며, 2012년에는 강원도 산업체우수강사로 활동했다.

회사 근무시간이 아닌 야간과 주말을 쪼개어 강의를 진행하는 것이 힘들 법도 한데, ‘강의실에서 만나는 이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일의 가치’가 너무나 소중해 그만할 수가 없다는 설명이다.

“제가 가르치는 것은 제가 가진 작은 기술이긴 하지만, 그 기술로 꿈을 찾는 다면, 현재의 자신이 처한 환경에 자포자기 하지 않을 거라고 믿습니다. 불우함과 가난은 나를 더욱더 강하게 만든다는 자신감을 갖고 가난은 내가 끊겠다는 강한신념을 가져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매번 강의실 문을 엽니다.”

아직은 성공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황 이사는 예전처럼 지금도 저는 처음과 끝이 늘 한결같고 변함이 없는 삶을 살겠다고 한다.

“정직하게 살아야 행복하다는 신념으로 기술개발에 매진하고, 꿈을 나누는 오늘에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후배 기능인들도 현재의 위치에서 이직을 생각 말고 달인이 될 때까지 한눈팔지 않도록 당부 하고 싶습니다. 그 때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면 ‘기술이 곧 자산’이란 것을 이해하게 될 꺼니까요. 저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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