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이제 다시 찾아야 할 때”
“대마도! 이제 다시 찾아야 할 때”
  • 양혜정 기자
  • free@energydaily.co.kr
  • 승인 2004.09.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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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호철 부산경남 취재본부장의 대마도 기행기

▲ 대마도 전경
“여보세요? 어! 여기는 대마도 인데 한국에서도 잘 들리나요?”

“네! 네! 아주 잘 들립니다.”

대마도에서도 핸드폰이 잘 통한다. 대마도에서 최북단에 올라 ‘외나무라’ 해안지역의 한국전망대에 올라서면 멀리 손에 잡힐 듯 부산이 보인다. 반대로 해운대 지역 고층 아파트나 달맞이 황령산에 오르면 쾌청한 날에는 대마도가 손에 잡힐 듯 보인다.

대마도에서 해질녘이면 부산의 명소 광안대교의 야경이 아름답게 빛을 발하고 카메라의 줌을 당기면 광안대교의 불야성 같은 야경을 선명하게 찍을 수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휴대폰을 꺼내들고 통화를 해 보거나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눈에 뜨인다.

부산과 대마도 간의 거리는 49.5km인 반면 대마도와 일본 규슈(九슈)는 147km나 더 멀리 떨어져 있다. 대마도 주민들은 1950년대 초반까지 저녁에 배를 타고 부산에 가서 술도 마시고 영화도 보고, 시장도 보면서 관광을 하고 놀다가 다음날 아침에 돌아 왔다고 현지인들은 말하고 있다.

이후 오랫동안 부산과 대마도의 뱃길이 끊겼으나 1999년 정기 여객선이 운항하면서 대한해협이 다시 활기를 되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특히 올해는 서울-부산 고속철도(KTX)가 개통되면서 대마도는 서울에서 반나절이면 갈 수 있는 섬이 되었다. 서울에서 KTX를 이용하여 부산에 도착하면 부산에서 오전 10시 30분에 대마도행 여객선을 갈아 탈수 있다. 부산 출항 후 정오쯤 되면 대마도 최북단 ‘히타카쓰’ 항구에 도착한다. 도착한 후 한모금의 공기를 들이쉬고 풍경을 둘러보면 영락없는 대한민국의 역사와 혼이 숨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마도에 사는 동식물들도 우리들 눈에 익은 수많은 들풀이며 한국 꿩, 말, 들고양이 등 일본열도에서는 볼 수 없는 우리의 동식물들이 서식하고 있으며 대마도 안의 웬만한 사찰에서는 고구려의 불상, 이사신라의 불상들 조선조의 범종들이 모셔져 있었다. 어디에 가보아도 우리 조상들의 숨결, 얼굴, 농기구 등 우리의 옛 마을에서 보았던 조상들의 혼이 엿보인다.

일본에 볼모로 잡혀갔던 신라왕자 미사흔을 탈출시키고 처형당한 그 박제상의 순국비, 조선 숙종 임금 때 조난당해 목숨을 잃었던 조선역관사 108명을 기리는 역관사비, 왜구가 주는 음식을 먹을 수 없다고 버티다 순직한 최익현의 순국비, 정략결혼으로 대마도주(馬主) 가문으로 출가 했던 덕해옹주(고종황제의 딸)의 기념비 등 곳곳에 우리 대한민국 선조들의 넋과 혼이 숨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본디 대마도라는 섬 자체가 경상도 옛 계림에 속해있는 우리나라의 땅이었다. 이것은 옛 고문서와 일본의 고문서에도 기록되어 있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 당시에 땅이 워낙 좁은 섬인데다 바다 한가운데 있어서 육지와 내왕이 불편한 관계로 백성들이 들어가 살지 않았을 뿐이었다고 역사는 전한다.

그런 와중에 일본 땅에서 쫓겨나 오갈 데 없었던 일본인들이 몰려들어와 살면서 왜인의 소굴이 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조선조 세종실록의 기록에서도 엿볼 수 있다.

16세기 조선의 조정이 펴낸 지리서인 동국여승람 지도에도 대마도는 옛부터 우리의 경상 계림에 속해 있었는데 언제부터 왜민들의 소굴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쓰였다고 한다. 그 당시 김정호 선생의 대동여지도를 비롯하여 조선시대에 간행된 지도들에는 빠짐없이 대마도가 우리 대한민국의 영토로 기록돼 있다고 전한다.

또한 18세기 중반에 제작된 해동지도에는 “우리의 영토는 백두산 북쪽이 머리가 되고 태백산맥은 척추 가되며 영남의 대마도와 호남의 탐라도를 양발로 삼는다고 명기 되었다”고 부산대 사범대 지리학과 오건환 박사는 전한다.

심지어 임진왜란 당시까지에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들이 만들었던 팔도총도라는 지도에도 대마도가 조선의 영토를 표기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대마도를 돌아보니 우리의 것이 아닌 것이 없을 정도로 우리의 땅 우리의 백성들이었다고 생각되었다.

대마도가 속주라는 의식은 고려 때부터 있었다고 전한다. 고려중엽 대마도족에게 구당관(勾當官)과 만호(萬戶)라는 관직을 내렸던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 있었다. 본격적인 속주 우리영토의 작업은 조선 세종 때 이루어졌다고 하며 1419년 이종무 장군이 병선 277척에 1만7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대마도를 정벌한 기록이 있다. 1436년에는 대마도의 식량사정이 어려워지자 도 주인은 대마도를 아예 조선의 한 고을로 편입시켜 달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조선조, 대마도 정벌 후 경상에 예속됐던 우리 땅
옛 고문서, 일본 고문서에도 기록된 엄연한 사실
이승만 전 대통령 각국 외교단 만나 영유권 주장

이때 조선은 대마도를 경상도에 예속시키고 도주를 태수로 봉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 후 18세기 초 조선통신사를 따라 일본을 방문한 신유한의 해유록은 다음과 같이 당당하게 기록하였다.

‘이 대마도는 조선의 한 고을에 지나지 않는다. 태조가 조선왕실로부터 인준을 받았고 조선조정의 녹봉을 받으며 먹고 살면서 크고 작은 조선 조정의 통제를 받으며 살고 있다.’

일본은 19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대마도를 자기들 땅으로 편입을 시키게 된다. 1868년 대마도에서는 일본메이지 정부에 올린 봉답서를 보면 대마변이 조선의 변방속국이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고 전한다. “조선에 대해 빈신의 예를 갖추어 수백 년간 굴욕을 받았으니 분함이 이루 말 할수 없다.”라고 적혀 있다.

“지금의 세계부터 조선의 주조해준 도서대신에 일본조정이 만들어 주는 새로운 도장(인준)을 사용하며…”와 관련해 부산대 사범대 지리학과 오건환 교수는 일본과 청(淸) 양쪽에 조공을 바친 오끼나와의 튜큐 왕국처럼 조선후기 대마도는 조선과 일본 양쪽에 예속된 양속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해방 후 정부수립 직후인 1948년 8월 18일과 1949년 1월 8일 이승만 전 대통령이 대마도는 대한민국 땅임을 선언하고 일본에 대해 대마도 반환을 거듭 촉구해 해협을 사이에 두고 커다란 파장을 불러 일으켰던 것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이었다.

이에 당황한 일본 정부의 요시다 내각은 연합군 최고 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에게 손을 내밀면서 대한민국 정부의 이승만 전 대통령의 요구를 막아 달라 부탁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이후에도 공식 문서나 외교채널을 통해 대마도의 반환을 요구하던 각국의 외교사절을 만날 때마다 대마도는 대한민국 국토였음을 알리고 영유권을 주장하였다고 한다.

이에 그치지 않고 바다에도 이승만 라인이라는 일부구역을 설정해 이를 침범할 경우 나포하도록 하였으며 조선 거류민단 대마도 본부 이신연 단장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선언이 나왔을 때 대마도에 살던 어부 주민들은 한국이 독립을 통해 미국의 힘을 얻고 대마도를 찾으려고 한다.

이제 곧 일본인들은 쫓겨나게 생겼다며 크게 불안해 했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현재 일본인들은 끈질기게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며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오고 있다.

이들이 독도가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는 증거보다는 대마도가 대한민국 영토임을 입증 할 수 있는 역사적 자료와 사료는 무궁무진하다. 또한 독도에 대한 일본의 역사의식보다도 대마도야말로 진정 대한민국 영토라고 생각하는 우리 국민들의 의식이 훨씬 더 깊고 강렬한 것이다.

오건환 교수는 섬을 바꿔 놓는 공조(空鳥)정책 탓에 조선조정이 대마도를 우리 영토로 부속시킬 기회를 놓쳤다고 전한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독도 영유권 주장보다 대한민국의 대마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이 근거가 뚜렷하고 일본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았다는 사실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과 같이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고 우리의 영토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치인들이 많이 나오고 정부차원에서도 깊은 연구와 노력을 촉구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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