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면 향기가 있다
순천 선암사 차밭
그곳에 가면 향기가 있다
순천 선암사 차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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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02.17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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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차밭 한 자락을 일구기 위해 천년을 이어져 온 차밭 앞에 선다

중국의 혜능선사는 ‘차나 한 잔 하고 가라.(喫茶去)’라는 화두를 남겼다. 차는 진리를 지칭한다던가. 어떤 이는 또 이렇게 해석한다. 중국의 양자강 이남 사람들에게 차 마시기는 일상이듯 진리도 그렇다고. 진리와 일상이 별개가 아니라고.

차 한 잔으로 선(禪)의 경지에 드는 것이야 고승대덕의 일이고 여느 사람은 그렇지가 않다. 차를 앞에 놓고 있어도 생각은 좀체 향기와 색과 맛에 몰입되지 않는다. 여전히 이런저런 일상사에서 묶여 있을 뿐. 초의선사는 차를 마실 때는 마음 편하게 하라고 일러주었지만 여느 사람이란 게 어디 그런가?

차를 두고도 온갖 세상살이의 생각에 부대낄 때면 일본인들의 그 다례라는 게 이해가 되기도 한다. 그들은 차를 대하자마자 일상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으리라.

그래서 다실을 짓고 차에 관련된 법도를 만들었다. 다른 공간에서 일상과는 다른 몸짓을 행하여 정신이 세속에서 벗어나도록 한 것은 아닌지. 혹자는 일본 다도를 두고 형식에 치우쳐 있다고 하지만 여느 사람은 그런 형식을 통과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만 차의 세계에 조금이나마 다가갈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차의 세계에 어떻게든 한 발 다가가 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차밭을 찾아간다. 선암사 차밭. 호남고속도로 선암사 나들목을 벗어나 선암사에 이르면 거기 차밭이 있다. 기차 여행을 즐기는 분이라면 전라선이나 경전선을 타고 순천역에서 내린 뒤 선암사행 버스를 타야 한다.

조계산 남쪽 기슭의 선암사의 차밭은 크게 세 군데로 나누어진다. 가람 앞, 가람 뒤 그리고 조계산 기슭이다. 가람 앞의 차밭은 일주문을 들어서기 전, 삼인당 연못 위쪽에 있다. 조그마한 언덕을 중심으로 해서 1천여 평이 펼쳐져 있다.

가람 뒤 차밭은 대웅전을 뒤로 돌아가 칠전선원 뒤에 이르면 만나게 된다. 선암사의 대표적인 차밭으로 5천여 평에 이른다. 이상의 두 곳 차밭은 수백년에 이르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근래에 만들어진 것으로는 조계산 기슭의 산밭등 차밭이다. 수십 년 동안 우리 차를 보존해 온, 현재 선암사 주지인 지허(指墟)스님이 근래에 만든 차밭이다.

지허스님이 쓴 <지허스님과 차>라는 책에서 삼인당 차밭은 도선국사 때, 칠전선원 뒤는 대각국사 의천 때 조성됐다고 추론하고 있다. 이곳의 차밭이야말로 고래의 우리 차밭이라고 한다.

일제 강점기 이후 이 땅의 차는 일본의 야부기다 종이 석권하다시피 하고 있으나 오직 선암사 주변에만 우리 차가 남았다는 것.

우리 차는 일본의 야부기다 종이 갖지 못한 나름의 특징이 있다. 지허스님의 글에 의하면 우리 고유 차는 뿌리를 깊게 박는다. 삶의 저 깊이에, 역사의 저 밑바닥에 우리 민족의 근성이 박혀 있듯이.

이런 우리 차를 살리기 위해 임권택 감독이 회장인 우리 차 보존회가 선암사에서 시작돼 지금도 활동중이다. 물론 우리 차는 이런 모임을 통해서만 지켜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산기슭에 흩어져 있는, 눈에 띄지는 않는 야생 차나무처럼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우리 차를 아끼는 이들이 또한 많다.

2월 중순이라지만 조계산 계곡은 아직도 한겨울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겨울인데도 푸르른 차밭. 그 가장자리에 선다. 조계산을 불어 내린 바람이 차밭을 쓸어간다. 차 이파리는 흔들거린다. 뒤집히지는 않는다. 그 이파리에 햇살이 내린다. 언제나 밝고 맑은 남도의 햇살.

우리가 만나는 다갈색의 차에는 바람과 햇살이 들어 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오는 동안 우리의 몸이 되고 때로는 영혼도 된 그 바람과 햇살이. 우리는 그것들을 만나려고 오늘도 차를 마시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선암사에 가거나 조계산에 등산을 갈 때면 가람 앞뒤의 차밭 가에서 잠시 머무를 일이다. 자잘한 이파리들이 만드는 그 빛깔과 향기가 마음에 받아들여질 때까지.
집으로 돌아가서 차를 한 잔 마주하면 알게 된다. 마음에 차밭이 만들어져 있음을.



정법종 기자 power@epower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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