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 보리밭
남도의 보리밭
  • 에너지데일리
  • webmaster@energydaily.co.kr
  • 승인 2003.05.26 09: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직한 농사꾼들이 일궈낸 보리밭에 서면
황토색으로 불타오르는 풍경이 눈부시다

유명한 곳이 아니면 여행을 떠나지 않으려는 이들이 많다. 꼭 유명하지는 않아도 특색있는데를 찾는 이들이 많다. 여행은 유명한 곳이 아니면 특별한 데로 가야 하는가?

시선 아닌 마음을 즐겁게 하기 위한 여행이라면 유명한 관광지 아닌 ‘나의 장소’로 가야 한다. 그런 장소로 선택되는 게, 최소한 내게 있어서는, 남도의 보리밭이다.

이 땅의 보리밭은 어디에 있든 풍성하다. 서울의 몽촌토성에 있는 보리밭이든 강원도 산골에서 만난 보리밭이든. 이런데도 굳이 ‘남도의 보리밭’이라고 한정시켜 놓은 것은, 보리밭은 도시 변두리나 산골 아닌 넓은 들판에 있을 때 보리밭답기 때문이다. 들판의 바람과 햇볕, 툭 터진 전망과 어울릴 때 보리밭은 정감 있게 다가온다.

남도의 보리밭은 계절에 따라 이미지가 사뭇 다르다.
겨울에는 흙색이고 푸른 기가 조금 감도는 정도이다. 보리는 이파리 서너 장을 근근이 내밀고 있다. 물론 그 푸른 기운을 포기하지는 않지만. 그게 보리의 아름다움 겨울나기이다.

3, 4월에 이르면 보리밭은 윤기가 흐른다. 보리는 봄비를 맞고 쑥쑥 자라나서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발을 멈춘다.’ 뉘 부르는 소리가 없어도 보리 이파리의 그 윤기에 취해 발을 멈추게 된다.

보리밭의 유혹에 그만 사잇길 아닌 보리밭 한가운데 팔베개를 하고 눕기도 한다. 등에 눌린 보리 이파리가 뿜어내는 냄새. 달착지근하면서도 풀냄새 특유의 비린 맛이 도는 냄새. 거기에 취하면 보리밭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다.

보리 이파리 냄새는 보리 이삭이 패는 4월 말 보리피리를 만들 때도 맡아진다. 보리피리를 불려고 할 때 코로 밀려드는 냄새. 거기에 젖어서 불어야만 보리피리이다.

도시에서는 보리 이파리로 된장국을 끓여 보리 냄새를 맡는다. 거기에도 보리 냄새는 있지만 그것은 된장이나 멸치 냄새에 섞여 있다. 시골 보리밭의 냄새, 그러니까 흙과 어울린 그 냄새는 나지 않는다.

보리는 자랄 만큼 자란 4월 하순에는 이삭을 내민다. 이때 이삭은 보리 이파리와 색깔이 같다. 이삭이 나와도 여전히 청보리밭이다.

이 때부터는 바람에 쓸리는 보리이삭의 모습이 눈에 든다. 밀밭처럼 매끈하게 바람에 휩쓸리는 게 아니다. 시골 마을의 우직한 사람들처럼, 평생 농사를 지어온 그 분들처럼, 매끈한 맛은 없다. 어딘지 뻣뻣하다. 그렇기는 해도 바람을 외면하지는 않는다.

(김수영은 ‘풀’이란 시로서 민중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바람 앞에 눕는 풀. 그가 말한 풀은 종류가 무엇일까? 흔히들 풀이라고 하면 잔디를 떠올린다. 그런데 이 땅의 잔디는 바람이 불어도 눕지 않는다. 그가 말한 풀은 무엇일까? 단순히 민중을 상징하기 위해 불특정의 풀을 택했다면 구체성이 없는 것이다.

역사에 바로 바로 순종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거기서 벗어날 수도 없는 민중을 형상화할 때 뭐가 좋은가? 나는, 보리가 제격이라고 믿고 있다. 나와 같은 생각 때문에 많은 이들이 보리를, 보리밭을 예술의 소재로 선택했다고 여기고 있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이삭. 그것은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풍경이다. 바람과 보리밭이 만들어 내는 풍경.

(영화 ‘봄날은 간다’의 마지막 장면은 남도의 청보리밭이다. 남자주인공이 바람이 보리밭을 쓸어 가는 소리를 녹음한다. 이삭이 팬 청보리밭은 녹음 대상으로는 적합하지가 않다. 청보리밭은 풍경이다. 소리가 아니다. 남도의 들판에 나가 보면 청보리밭은 소리 아닌 풍경이라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다.)

5월 하순에 이르면 보리밭은 황토색이 된다. 익은 이삭은 물론이고 보리 이파리와 줄기도 황토색으로 변해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보릿대’가 된다.

황토색으로 타오르는 보리밭. 남도의 봄날, 그 막바지에서 보리밭을 만난다.

눈부시다



정법종 기자 power@epowernews.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명칭 : (주)에너지데일리
  • (우)07220 서울 영등포구 당산로38길 13-7 주영빌딩 302호
  • 대표전화 : 02-2068-4573
  • 팩스 : 02-2068-457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송병훈
  • 제호 : 에너지데일리
  • 신문등록번호 : 서울 다 06719
  • 등록일 : 1999-07-29
  • 인터넷등록번호 : 서울 아 01975
  • 등록일 : 2012-02-16
  • 발행일 : 1999-09-20
  • 발행인 : 양미애
  • 편집인 : 조남준
  • 에너지데일리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에너지데일리.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energydaily.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