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헌책방거리
청계천 헌책방거리
  • 에너지데일리
  • webmaster@energydaily.co.kr
  • 승인 2003.06.09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 나름의 운명을 거쳐온 책들이 모여 있는 헌책방
거기서 만나는 것은 정신을 예우하는 인간의 삶이다

“모든 책은 제 나름의 운명이 있다.” 책에 관한 여러 명언들 중의 하나이다.

그렇다면 어떤 책이 행복하고 또 어떤 책이 불행한가? 모험과 도전의 삶을 보낸 책이 있는가 하면 평범하게 살아 온 책이 있는가?
책의 운명을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책 자신이다. 그것도 세월을 보낸 책이다. 이런 책을 두고 우리는 흔히 ‘헌책’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길거리에서 만나는 여느 서점에는 헌책이 없다. 서점에는 새 책이 (운명이 아직 시작되지 않은 책을) 모여 있다. 책장의 보풀과 잉크 냄새와 코팅된 표지의 번쩍거림만 있는 책. 사랑하는 이나 친구를 향한 헌사나 고뇌에 찬 나름의 주석이 없는, 한 마디로 독자의 손때가 묻지 않은 책.

헌책은 (제 나름의 운명을 겪은 책은) 헌책방에 있다. 헌책방을 찾아서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으로 간다.

(헌책 수집가의 여러 모습을 전하는 조희봉의 ‘전작주의자의 꿈’이란 책에는 서울의 헌책방에 관한 여러 정보가 나와 있다. 그에 의하면 현재 서울에는 청계천, 신촌, 신림동, 용산역 인근 등에 헌책방이 남아 있으며 청계천에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돼 있다. 그는 서울과 인천의 헌책방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지만 그 나머지는 말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헌책방은 현재에도 전국의 도시에 남아 있다. 많지는 않아도 남아는 있는 것이다. 광주의 예를 들자면 반세기 전부터 형성된 헌책방 거리가 지금도 그 흔적을 남기고는 있다. 광주고등학교 정문에서 예전의 계림동 파출소까지 약 5백미터에 이르는 헌책방 거리에는 열 곳 가량의 헌책방이 남아 있다.)

밤 아홉 시 반. 평화시장. 촘촘하게 박힌 가게들 사이에서 어디에 헌책방이 있는지 찾자마자 눈에는 동대문에 들어선 의류상가들만 보인다. 밀레오레. 두타. 거평 프레야. 그리고 또...... . 의류상가 건물들은 다들 수십 층이고 바깥에다는 광고용 네온사인을 내걸고 있다. 번쩍거리는 네온사인에 눈빛이 혼란스러워 가까운 평화 시장의 간판들을 분간할 수 없다.

서울에서 밤 아홉 시 반이면 초저녁인데 평화시장 가게들은 대부분 문을 닿았다. 동대문 의류상가가 밤새 문을 열고 있는 것에 비하면 평화시장의 폐장은 주도권을 상실한 자의 아픔을 전한다. 페인트칠이 벗겨진 셔터들이 그런 아픔을 짙게 해 준다.

그래도, 아직 문을 닫지 않은 헌책방은 있다.

밖에서 보니 헌책방 안에는 손님이 없다. 주인 아저씨는 헌책방 입구에서 등을 거리에다 대고 오줌을 싸고 있다. 그의 손에는 두 홉들이 플라스틱 통이 들려 있다. 그는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오백원짜리 동전 두 개 가량의 넓이밖에 되지 않는 플라스틱 통에다가 오줌을 싼다.

화장실이 갖춰져 있지 않은 두어 평짜리 가게. 거기에 바닥에서 천장까지 차곡차곡 쌓여 있는 책들. 질식할 듯한 모습이다. 나는 거걸 보고 서울 산동네의 집들을 떠올린다. 다닥다닥 붙어서 위아래로 층을 이루고 있는 집들. 거기에 사는 곤궁한 사람보다 더 곤궁하게 보이는 집들.

헌책방의 헌책들 사이에 선다. 제 나름의 운명을 거친 탓인지 헌책들은 아주 느긋하다. 시원에서 흘러내려 산골짜기와 들판과 마을 옆을 거쳐서 이제는 하류에 이른 강물처럼 그렇게 조바심 치지 않는다. (운명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조바심 쳐 봐야 다 부질없다는 것 아니던가? 그걸 헌책은 다 알고 있는 듯하다.)

헌책의 느긋한 자세에서 정신의 넓이와 깊이를 배운다. 우리가 책을 읽으며 배우는 것이 정신의 넓이와 깊이인데, (현대에는 먹고 사는 일에 관련된 책을 주로 찾지만 그래도 여전히 책은 저 광대한 정신의 세계와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메신저 아닌가?) 헌책은 자신이 겪은 세월을 통해 그걸 다시 한번 온몸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헌책방 주인이 이제 문을 닫는다. 밖에다 전시했던 책들은 놓아 둘 서점 안의 여유 공간이 없으므로 밖에다 그대로 둔다. 노끈으로 묶인 책들.

정신을 예우하는 인간으로서 살아 왔듯이 앞으로도 변함없이 그러할 것임을 헌책 더미와 약속한다. 약속의 순간을 남겨 두려고 나는 헌책 더미에다 사진기를 들이댄다.
길에 서자 평화시장 건물이, 불이 꺼져 있는 회색 건물이 길게 늘어서 있다. 그 너머로 의류상가들이 보인다. 밤새 불이 꺼지지 않는, 그 화려한 건물들이.

나는 헌책 한 권을 손에 들고 헌책방을 찾아 나선다. 아직도 문을 닫지 않은 헌책방이 또 있으리라고 믿기에.



정법종 기자 power@epowernews.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명칭 : (주)에너지데일리
  • (우)07220 서울 영등포구 당산로38길 13-7 주영빌딩 302호
  • 대표전화 : 02-2068-4573
  • 팩스 : 02-2068-457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송병훈
  • 제호 : 에너지데일리
  • 신문등록번호 : 서울 다 06719
  • 등록일 : 1999-07-29
  • 인터넷등록번호 : 서울 아 01975
  • 등록일 : 2012-02-16
  • 발행일 : 1999-09-20
  • 발행인 : 양미애
  • 편집인 : 조남준
  • 에너지데일리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에너지데일리.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energydaily.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