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보림사(寶林寺)의 샘
장흥 보림사(寶林寺)의 샘
  • 에너지데일리
  • webmaster@energydaily.co.kr
  • 승인 2003.06.16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천년을 내려온 부드러운 맛에 풍성한 수량
버림의 미학까지도 거기에서 배울 수 있다

이 땅의 석탑은 위층으로 올라가면 줄어든다. 위층의 몸체는 아래층의 그것보다 작아지고 지붕은 좁아진다. 위아래 층이 같은 크기인, 중국의 소주나 항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목탑과는 형태가 다르다.

줄어듬. 이것이 지닌 미학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다. 최초로 석탑을 강하게 의식한 건 중학교 수학여행 때였다. 당시, 불국사의 다보탑이 석가탑보다 맘에 들었다. 다보탑은 줄어듬이 없지만 석가탑은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줄어든다는 것을 당시에는 의식하지 못했으므로 다보탑과 석가탑의 비교에 줄어듬을 끌어들인 것은 아니었다. 그저, 석가탑보다는 다보탑이 더 화려하고 다양하다는 사실에 맘이 끌렸다.

이 땅의 석탑이 위층으로 올라가면서 줄어든다는 게 눈에 들어왔다. 언제부터 그렇게 됐을까?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내가 다음과 같은 말을 이해하게 된 때부터가 아닐까? ‘부자가 된다는 것은 물질적으로 원하는 것을 다 얻어서가 아니다. 어릴 적부터 원한 물질들이 사실은 하찮다는 것을 알게 되는 때부터 우리는 부자가 된다.’
석탑의 줄어듬, 그것은 버림의 미학을 표현한 것이라고 믿게 됐다. 버림이 불교의 핵심이라는 말을 들은 이후 석탑이 위로 올라갈수록 줄어드는 걸 보고 있노라면 불교의 세계를 어렴풋하게 이해할 듯도 했다.

석탑의 줄어듬에 눈여기게 된 후 나는 장흥 보림사에 가면 두 기의 3층 석탑들 앞에 오래 서 있곤 했다. 1천 3백여 년 전 석탑들을 세운 사람들이 어떻게 버림의 미학을 이루어 냈는지를 되새기면서.

여기서 잠깐 부언하자면 장흥 보림사는 1천 3백여년 전인 759년에 가지선사(元表大德)가 창건했다. 그 후 보조국사가 크게 절을 넓혔고 헌강왕은 보조국사의 입적 후 절 이름으로 보림사를 정해 주었다. 신라 말에 보림사는 9산선문의 하나인 가지산파를 이룬다. 가지산파는 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했으며 그들 중에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이는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 스님이다.

한국전쟁 당시 보림사는 두 채의 건물만 남기고 다 타 버렸다. 지금의 대웅보전, 대적광전은 최근에 지은 건물들이다. 1백년의 세월도 채 견디어 내지 않은 절집. 그걸 보고 싶은 맘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3층 석탑을 보고 나서는 대적광전의 비로자나불은 보면서도 대적광전의 단청에다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대웅보전으로는 아예 가지도 않았다.

절에서 나가기 전에는 샘으로 가서 물을 마시곤 했다. 물맛은 부드럽다. 몇 모금을 마셔도 여전히 부드럽다. 또한 어느 계절에 마셔도 부드럽다. 내 몸과 잘 맞는다는 것일 게다. 보림사의 자랑이고 국보이기도 한 석등이 양측의 3층 석탑들과 잘 어울리는 것처럼 내 몸과 샘물도 그렇다.

샘물은 풍성하다. 움푹 들어간 바위틈에 몇 바가지의 물이 고이는 석간수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왈칵왈칵 밀려 나온다. 목마름을 달래주고 마음까지 적셔줄 듯이 그렇게 풍성하다.

보림사에 틈나는 대로 들른 지 10여 년. 최근에야 나는 보림사 샘물을 마시고 나오다가 샘의 집인 수각(水閣)과 대웅보전과 가지산을 한 눈에 보게 됐다. 수각 입구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가지산 마루로 눈길을 주다 보니 그것들 셋이 함께 보인 거였다.

가지산, 대웅보전 그리고 수각은 석탑의 줄어듬을 거꾸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가지산 능선에서 대웅보전의 마루로, 거기에서 다시 수각으로 점점 줄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석탑을 볼 때만 줄어듬의 미학을 되새기던 나로서는 생각하지도 않은 데서 줄어듬의 미학을 발견하고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산이 줄어들어 대웅전이 된다. 대웅전이 줄어들어 샘이 된다. 이제 샘은 무엇이 되는가?
보림사 샘이 던지는 화두이다.



정법종 기자 power@epowernews.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명칭 : (주)에너지데일리
  • (우)07220 서울 영등포구 당산로38길 13-7 주영빌딩 302호
  • 대표전화 : 02-2068-4573
  • 팩스 : 02-2068-457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송병훈
  • 제호 : 에너지데일리
  • 신문등록번호 : 서울 다 06719
  • 등록일 : 1999-07-29
  • 인터넷등록번호 : 서울 아 01975
  • 등록일 : 2012-02-16
  • 발행일 : 1999-09-20
  • 발행인 : 양미애
  • 편집인 : 조남준
  • 에너지데일리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에너지데일리.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energydaily.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