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拯의 열린사고
尹拯의 열린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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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4.04.06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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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차별하는 정치참여거절

논어도 좋지만 맹자도 또한 감칠맛이 있다. 논어가 서울깎두기집 설렁탕처럼 담박한 뒷맛이 남는다면 ‘맹자’는 목포집 홍탁처럼 입천장을 시원하게 해주는 맛이 있다.

‘맹자’에 나오는 “달즉겸선천하(達則兼善天下)궁즉독선기신(窮則獨善基身)한다”라는 대목이 바로 그 맛이다. 매사에 일이 잘 풀려 나갈 때에는 세상에 나가 좋은 일도 해보지만 궁할 때에는 홀로 도를 닦는데 힘쓴다는 정신은 조선선비들의 진퇴관(進退觀)이었다.

특히 궁즉독선기신은 궁색한 처지로 불렸을 때에도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잃지않게 해주는 ‘묘자보약’과도 같은 것이다.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의 명재윤증(明齎尹拯 1629-1714) 고택을 찾아 보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바로 선대할아버지의 정신과 품위를 소개하고 싶기 때문이다.

계룡산 계곡에서 고만 고만하게 내려온 ‘금체(金體):둥그런 모양의 산봉우를 뜻하는 풍수학적 표현’삼봉우리들이 소담스럽게 내려온 노성안, 그 노성산 자락의 양명한 터에 파평 선대 할아버지인 尹拯(윤증) 종택이 자리잡고 있다.

산세를 살펴보면 부드러운 곳에 자리를 잡았지만 이 집에서 사셨던 윤증 할아버지는 세상이 아무리 불러도 나가지 않았던 감골의 선비이셨다고 우리 가문에서 대대로 전해내려고 있다.

윤증 할아버지는 평생을 사시는 동안 조정으로부터 20번을 넘게 벼슬을 제의 받았다. 대개의 경우 2-3번 사양하다가 마지 못한듯 나가주는 것이 상례였을 것이다. 윤증 할아버지는 남다른 분이셨다고 전해져 온다.

말년에는 숙종임금이 직접 정1품 우의정을 주신다고 해도 받지 않았고 조선의 선비중에 임금께서 당사자의 얼굴도 보지않고 정승자리를 제안한 경우는 윤증 할아버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윤증 할아버지는 끝까지 벼슬을 하지 않고 학행을 닦는 학자로서 일생을 마치셨다. 그분이 그처럼 벼슬자리를 거부한 이유는 당대의 메인스트림(main-strem)을 대표하던 노론의 영수 우암 선생과 결별했지 때문이었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우암으로 대표되는 노론중심의 정치체제를 거부했던 윤증 할아버지는 노론의 전횡을 끝까지 비판하셨다고 한다.

그분은 일생에 있어 딱 한번 벼슬을 하려고 서울 근교의 과천까지 상경하셨던 적이 있었다.

단, 벼슬을 하는데 전제조건이 하나 있었다. 그 당시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던 영남지방의 남인들을 포함해 포용할 수 있는 내각구성을 하면 조정에 입각하겠다는 조건이었다.

즉 지역 차별이 체결되지 않으면 벼슬을 하지 않겠다는 전제조건이었다.

그 당시에는 영남지방의 남인들이 기호지방의 노론들에게 밀려 심각한 지역차별을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

윤증 할아버지는 논객이라 할 수 있는 박세채(朴世采)와 과천에서 이 문제를 두고 밤을 세워 토론한 끝에 이 전제 조건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결연하게 벼슬을 포기하셨던 분이다.

윤증 할아버지께서는 정녕 명분에 맞지 않는 사안에 대해서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분이셨던 것이다.

잘못되었을 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선비가 진정 선비일 것이다

어쩡정한 상태에서 ‘그렇다’라고 했다가 스타일만 구기고 무대에서 내려와야만 했던 사례들을 우리들은 근자에도 수도 없이 목격하고, 군중들을 동원한 목소리에 수천만의 국민들은 경악하고 있다.

윤증 할아버지는 재야에서 학자로서 살아오셨지만 죽림칠현류(竹林七賢流)의 낭만적인 전원생활을 영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끊임없이 조정에 상소들을 올리면서 한편으로 치우친 정치현실을 타개하려고 심혈을 기울여 오신 것이었다.

우리 윤씨 집안에서 세운 사립학교인 ‘종학당(宗學堂: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에서 49명의 과거를 급제자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대부분 윤증 할아버니의 훈도를 받은 제자들이셨다.

당신께서는 세상에 나가 좋은 일과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겸선천하의 인생을 살아가도록 이끌었던 것이다.

윤증 할아버지는 종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중인 신분에 있던 사람들도 받아들였다. 배움과 가르침에 있어 신분차별을 두지 않으셨던 것이다.

조선시대와 같이 철저한 신분제 사회에서 이와같은 포용은 쉽게 실천할 수 있는 덕목이 아니었다.

한번은 노성리 윤씨들이 동네사람들의 원성을 샀던 적이 있었다. 양잠(누에치기)에 필요한 뽕잎을 양반인 윤씨집안에서 수탈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전해져오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뒤늦게 알게된 윤증 할아버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집안사람들에게 지시하셨다.

“우리가문이 선대 이래로 이곳 노성리에 와서 살게된지 백년이 넘도록 남에게 원망을 듣지않았다. 남에게 조금도 피해를 주지 않았지 때문이었다. 우리 윤씨 집안에서 원망의 원인인 양잠(누에치기)을 지금부터 금지하라”는 지시였다.

윤씨 집안의 종택들은 담장이 없다. 할머니와 어머니 숙모님 등 여성들이 거주하는 안채에만 담장이 있고 사랑채 앞 넓은 마당에는 담벼락이 설치되어있지 않다.

대문과 담장없이 사랑채에 곧바로 들어갈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다. 나는 이와 같은 구조는 우리나라의 종택과 고택에서 매우 희귀한 구조라고 생각해 왔다.

윤증 할아버지가 이와같이 두려움이 없는 삶을 살았던 ‘무외’(無畏)의 학자였다고 생각한다.




윤호철 기자 yaho@epower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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