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척과 천붕
참척과 천붕
  • 에너지데일리
  • webmaster@energydaily.co.kr
  • 승인 2004.10.29 18: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간혹 남의 일에는 무관심하기 마련인 인간의 속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다른 사람의 죽음 이후에 벌어지는 응급실 의료진의 모습이다.

응급실의 의사, 간호사는 막 사망선언을 하고서도 돌아서서 웃는 사람들이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냉정하고 감정도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그리고 심리학적으로 보면 이 또한 자기 감정 방어이거나 너무나 일상적으로 겪는 일이기에 무심해진 결과이기도 하다.

사실 하루에도 몇 번씩 죽음을 경험하는 의사, 간호사들이 한 사람이 죽을 때마다 그 감정에 몰입되면 환자를 보는 것은 고사하고 정상적으로 살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대부분의 환자의 죽음에는 무심해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아무리 무심해도 환자의 죽음에 슬픔과 혹은 분노를 느끼는 경우도 있다. 바로 인간으로서 살아가면서 가장 슬픈 일 가운데 하나인 자식의 죽음이다.

미리 말하자면, 간혹 언론에서는 어린 자식을 동반한 부모의 자살을 두고 부모를 비난한다. 물론 자식마저 죽이는 것은 잘못된 일임에 틀림없지만, 대개 자식과 함께 자살하는 부모들은 이 험한 세상에 부모 없이 살아갈 자식들이 애처로워 같이 죽는 마음이라고 하니, 마냥 비난만 하기 어려운 면도 있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면 유교문화권에서는 부모가 사망하면 천붕지통(天崩之痛)이라고 한다.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이라는 뜻이다. 반대로 자식이 먼저 사망하면 참척(慘慽)이라고 한다. 비할 수 없는 슬픔, 참혹한 슬픔이라는 뜻이다.

응급실에서도 나이 드신 분들의 사망에 대한 보호자들의 반응은 대체로 슬픔을 안으로 삼키면서 우는 정도다. 반면 어린 자식의 죽음에는 누구도 달래지 못할 정도다. 의사, 간호사들도 아직 어린 아이나, 청년기의 환자가 사망하면 노령의 환자의 죽음과 달리 슬픔은 물론 분노조차 느끼면서 한동안 환자를 진료하지 못할 정도로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게 된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응급실에서 한창 때의 젊은 사람의 자살이 많아지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또 명절 전후에 노년기 분들의 자살도 많아지고 있다. 오랜만에 만난 일가 친척끼리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술을 마신 후의 감정 토로가 결국은 끔직한 비극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예나 지금이나 가족과 친척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때로는 마지막 버팀목이다. 갈수록 힘들어지는 세상에서 이같은 참척과 천붕의 의미를 되새겨 일가 친척 간의 정을 되돌아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참고로 참척이나 천붕과 같은 비극이 생겼을 때 사람은 다음과 같은 마음의 변화를 겪게 된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에 임박하였을 때 가지게 되는 첫번째 마음은 부정이다.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자식이 죽었다고 의사가 아무리 말해도 부모는 인정하지 않는다. 의사에게 매달리면서 계속 소생술을 해달라고 하고 숨을 쉬는 것 같다, 움직이는 것 같다고 하면서 아직 살아 있다고 하는 것은 참척을 당한 대부분의 어머니가 하는 말이다.

부정의 단계가 지나가면 그 다음은 분노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는가, 왜 나만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하는 마음이다. 신에게, 의사에게 가족에게, 자기 자신에게 분노하게 된다.

다음에는 투사의 단계다. 즉 고통의 원인을 다른 사람이나 신에게 돌리고 원망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의사가 잘못 치료해서 죽었다고 생각하고 의사를 원망하는 마음이다.

다음은 타협이다. 죽었지만 천국에 갔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도 죽으면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마음이 타협이다.

마지막이 수용이다. 어쩔 수 없는 한계 상황을 받아들이고 삶을 다시 정리한다. 수용의 최선은 승화다. 비극을 겪음으로 타인을 더 사랑하게 되고, 타인의 고통에 관심을 두게 되는 것이 승화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자살은 남은 사람들에게도 최악의 선택임을 알고, 올해에는 참척과 천붕이 보다 적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 김승열 / 강릉동인병원 응급의학과 과장, 영동응급의료정보센터 소장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명칭 : (주)에너지데일리
  • (우)07220 서울 영등포구 당산로38길 13-7 주영빌딩 302호
  • 대표전화 : 02-2068-4573
  • 팩스 : 02-2068-457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송병훈
  • 제호 : 에너지데일리
  • 신문등록번호 : 서울 다 06719
  • 등록일 : 1999-07-29
  • 인터넷등록번호 : 서울 아 01975
  • 등록일 : 2012-02-16
  • 발행일 : 1999-09-20
  • 발행인 : 양미애
  • 편집인 : 조남준
  • 에너지데일리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에너지데일리.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energydaily.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