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담양의 대밭
전남 담양의 대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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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04.21 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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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밭에서 만나는, 대나무의 직선에 깃들인 곡선
극과 극이 통하는 유현한 동양정신에 마음을 적신다

마을이 있으면 거기 대밭이 있고 대밭이 있으면 거기 마을이 있는 담양.
담양은 그렇게 대밭의 동네이다. 어디를 가 봐도 대밭을 찾을 수 있다.

대나무는 가공돼 많은 생활용품을 만들어 냈다. 조리 같은 작은 물건에서부터 대바구니 같은 큰 물건까지. 참빗으로 대표되는 여성 물품에서 죽부인이며 삿갓과 같은 남성 물품까지.

대나무는 그 모습 그대로도 곳곳에서 쓰였다. 대나무 장대가, 깃대가 있다. 때로는 죽창으로도 만들어졌다. 백산에서 치켜 올려졌다가 우금치에서 핏물에 젖은 동학농민전쟁 때의 그 죽창.

무기가 되는가 하면 피리[竹笛]가 되었다. 만파식적(萬波息笛)에서부터 이 나라의 율려(律呂)에는 대나무가 자리 잡고 있다.

이런 화려한 역사를 지닌 대나무이지만 지금은 한가하다. 중국의 죽제품이 밀려들면서 담양의 죽제품은 예전처럼 팔리지 않기 때문이다. 고급화를 이루었는데, 이것은 그만큼 일반인과 거리가 생겼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전국 유일의 죽제품 시장으로서 새벽이면 전국에서 몰려든 죽제품 장사들이 북적거리던 담양의 삿갓점머리는 이제 장이 서지 않는다. 사람들은 담양의 죽제품을 사려고 하지 않는다.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죽제품 박물관에 들러 구경하는 게 고작이다.

죽제품이 만들어지지 않다 보니 담양의 대밭은 무성해졌다. 매년 베어져 나가야 할 대나무가 그대로 남아 있다 보니 대낮에도 바닥이 침침할 정도이다.

그 대밭을 만나러 담양으로 간다. 이미 말했다시피 담양에는 어디에나 대밭이 있다. 담양의 어디에다 차를 멈추어도 대밭을 찾을 수 있다.
차에서 내려 들길을 걷는다. 북으로는 추월산, 병풍산, 삼인산, 불대산이 있고 남으로는 무등산이 있으며 그 사이를 영산강 상류가 가로지르고 있다. 대밭이 없다고 해도 산과 물에 취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고장이다.

마을로 드는 밭둑길을 지난다. 이삭이 팬 4월의 보리밭이 펼쳐져 있다. 아직은 고개를 숙이지 않는, 꼿꼿하게 서 있는 그 보리 이삭의 넘쳐나는 힘이 봄을 느끼게 해 준다. 아무래도 봄은 이런 힘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하고.

대밭에 들어서면 눈앞을 채우는 것은 대나무 줄기들이다. 멀리서는 댓잎이 만든 푸르름이더니 대밭 안으로 들어서자 이제는 줄기들만 보인다. 그 줄기들을 바라보면서 한참을 서 있다. 뭔가 있을 듯하지만 아무 것도 없다. 그래도 그 ‘있을 것만 같은 것’을 기다린다. 휴대폰이 울어도 그대로 둔다. 차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댓가지 끝에서 일어나는 바람처럼 살랑거려도 좀더 버텨본다.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다던 정철은 성은(聖恩)이 도착하자마자 바로 죽림에서 뛰쳐나가지만, 그래서 그가 말한 ‘깊은 병’은 실은 병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는 심정으로 서 있다.

대나무가 뭔가를 가르쳐 주길 기다린다. 소동파는 어디로 가든 거기에다 대나무를 심었다지만, 하루를 머물다가 떠나는 곳이라고 해도 대나무 심는 일을 빠뜨리지 않았다지만 거기에서 느껴지는 것은 ‘소동파의 이미지 관리’이지 대나무와의 친화는 아니다. 나는 대나무와 친근해지려고 그래서 대나무가 내게 건네는 말을 듣고 싶어서 대밭 한가운데 서 있다.

햇살이 뉘엿뉘엿해진다. 대잎 밑으로 파고든 늦은 오후의 햇살에 대나무 줄기는 좀더 선명해진다.

바람이 분다. 위쪽의 댓잎이 운다. 이어서 대나무 줄기가 흔들거린다. 그 굽이침이 오후 햇살에 좀더 생생하다. 당나라 때의 왕유(王維)에게는 달이 찾아왔다지만 (深林人不知 明月來相照: 왕유의 ‘竹里館’ 中) 내게는 뉘엿뉘엿한 햇살이 찾아왔다.

뉘엿뉘엿한 햇살에 드러난 대나무 줄기들에는 곡선이 깃들이어 있다는 게 보인다. 직선이 품고 있는 곡선.

자신의 모습을 지켜나가면서 반대편의 극단을 포용한다는 것. 제 길을 가되 때로는 굽이치는 황하, 쉽게 굽이치는 게 아니라 천리는 가서야 비로소 한 번 굽이친다는 황하의 그 자태.

우리는 자신의 취향이거나 이익이 되는 것 하나만을 보려고 한다. 나중에는 모든 것을 그 하나에다 맞추려 든다. 어느 인도인의 말대로 ‘세상 모든 것은 같게 보려고 하면 다 같게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폭력이다. 대나무를 보고 피리만 생각하는 사람도, 죽창만 떠올리는 이도 다 폭력적이다. 거기서 벗어나야 한다. 그게 바로 평화이다.
극과 극이 통한다. 유현(幽玄)한 동양 정신, 그 가없는 바다는 그런 사실을 수천년 전부터 말해 왔지 않은가?

그 표상인 대밭을 다시 만난다. 이 봄에. 폭력에 얼룩진 잔인한 4월에.



정법종 기자 power@epower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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